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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Feb 14. 2022

[육아] 내가 키우고 있다는 오만에서 벗어나기

내가 들어보지 못해서, 아이에게 해주지 못한 말들 독후감

 신체나 정신적으로 충분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태를 '장애'라고 한다. 나는 '게임'을 잘 못하므로 관련 부분에 '장애'가 있다. 유연성이 극하게 떨어져 있어, 서 있는 상태로 발뒷꿈치를 잡지 못한다. 관련 장애가 있다. 엄청난 악필이라 관련 부분에 장애가 있다. 일상생활이나 사회 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상태를 '장애'로 여길 때, 내가 어떤 일상을 살고 있는지, 어떤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장애인으로 구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기능이 점차 열화하여 부분적으로 고장나는 것을 '퇴화'라고 한다. 이는 일종의 '장애'일 수 있다. 다시 기능이 성숙하지 못하여 부분적으로 서투른 것 또한 '장애'다. 누구나 장애는 있다. 대한민국 성인 10명 중 6명은 안경을 착용한다. 안경은 시력 보조장치로 굴절이상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을 위한 도구다. 즉, 사람은 누구나 장애로 시작하지만 그 종착지도 나이가 들면서 다시 장애로 이어진다. 우리는 완전해져 가고 있다는 착각속에 빠지고 있지만, 성장은 퇴화와 연결되어 원점인 '장애'로 돌아간다. 내가 나은 점이 있다고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된다.  조선초기에 '허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체높은 양반이었고 그의 자식 중에는 '서자'가 있었다. 다만, 이 서자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보국숭록재부'로 정 1품의 품계를 받아 임금 다음의 높은 품계를 가진 '허준'이 되었다. 기어 다니거나, 대소변을 구별하지 못하는 '미숙'의 상태를 지켜봤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 누구도 '허준'과 '허론' 중, '허론'을 더 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애를 차별하는 것은 '비문명'이자, '야만'이다. 사회는 진보될수록 상호 보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즉,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노래만 잘해도 먹고 살 수 있고, 춤을 잘 추는 사람은 춤만 잘 춰도 먹고 살 수 있으며, 치료를 잘하는 사람은 치료를 잘하는 것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그 상태가 되기 위해선, 사회 구성원이 각자 재능있는 분야에 몰입하고 부족하거나 장애가 있는 부분을 상호 돕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즉, 상대의 장애를 보안하고 나의 장애를 들어내는 사회가 건강하고 발전할 수 있는 사회다.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을 인정하자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단, 아이의 부족함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아이의 보호자가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아이가 불완전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아이는 사실 '스스로' 완전해진다. 똑똑한 아이를 만드는 방법이나, 공부 잘하는 아이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는 책보다는 아이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 책은 몹시 호감이 간다. 나는 아이가 똑똑하게 크길 바라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노벨상으로 받은 상금을 첫 번 째 부인과 이혼 후 보육료와 위자료로 모두 지급했다. 또한 스스로를 '불행한 남자'로 언급하기도 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지극히 가난하여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물감을 입 안에 짜 넣는 삶을 살았고 모차르트는 경제 상황이 몹시 궁하여 주변에 돈을 빌리러 다니곤 했다. 심지어 병마를 얻고 젊은 나이에 요절 했다. 우리 아이가 아인슈타인이나 고흐,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가 되길 원치 않는다.

 아이와 함께 살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20년도 되지 않는다. 요즘은 고등학교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경우도 많고, 빠르면 초등학교, 중학교를 입학하거나 고등학교를 진학하더라도 '학교'와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훨씬 길다. 즉,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난 뒤부터, 아이와 부모의 관계는 '키운다'가 아니라 '동거한다'로 바뀐다. 아이를 키우는 기간은 실제 10년 남짓이다. 그 뒤부터 아이와 부모의 관계는 사실상 '동거인'의 관계다. 가만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쉽지 않았다. 친구와 함께 살면 항상 싸움이 일어난다. 이처럼 아이와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이가 속을 썩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여차하면 내멋대로 될 것 같은 상대가 내뜻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오만이 있어서다. 부모나 친구처럼 동등하거나 상대가 우위라고 여겨지는 관계에서는 상대가 내가 일부 상대에게 맞춰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자신이 키우고 있다고 여기는 관계에서는 무조건 상대가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고 착각한다. 앞서 말한 '장애'의 이야기를 이어가면 그렇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와 동거를 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어르신'과 동거를 할 때, 어르신이 자신의 눈을 보며 말하지 않는다고 화가 나거나 하진 않는다. 다만, 아이의 경우에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사실 아이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완숙한 상태가 아니다. 고로 성인처럼 부르는 말에 즉각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손의 감각이나 공간 감각이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연히 밥을 먹을 때, 밥을 흘리기도 하고 조심히 하려고 애를 써도 입에 잔뜩 묻히고 먹게 된다.

 호르몬의 영향으로 여성은 식욕이 강해지거나 단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시기가 있다. 호르몬이 균형이 맞춰지기까지 심하게 출렁이며 불규칙하게 호르몬이 방출되면 아이는 주위가 산만해지거나 쉽게 슬퍼지거나, 쉽게 기뻐진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이런 감정 변화에 대해서 우리는 이해를 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갑자기 때를 쓰거나 울어버리거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주변을 어지럽히고 때리고, 던지는 아이를 볼 때는 '호르몬'이 아니라, '버르장머리'의 문제라고 여긴다. 갱년기 어르신의 감정변화는 '버르장머리'가 아니다. 사춘기 아이와 배란기 여성의 감정변화는 '버르장머리'가 아닌데 아이에게는 '버르장머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정신을 똑바로 차려, 우울함을 버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호르몬 조절을 위해 투약이 필요하다. 즉, 이는 자신이 주체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다만 아이의 경우에는 호르몬 분비가 불균형하게 출렁거리며 점차 안정적인 상태로 맞춰지기 때문에 약을 투여하기 보다는 조금 더 지켜보는 편이 좋다. 책은 '어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읽으려는 부모에게는 적합하지 못하다. 이 책은 아이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아이를 이해하고, 아이와 부모가 모두 행복해지기 위한 책이다. 살면서 우리는 평가를 받는다. 선생님으로 평가를 받고 교수로 부터 평가를 받는다. 항상 '문제'를 제시하는 쪽은 상급자였다. 이번에는 '나의 자녀'다. 아이를 올바르게 대하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한다면,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와 어른을 대하는 태도, 상대를 대하는 태도의 넓이가 더 넓어질 것이다. 내가 상대를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상대도 나를 성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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