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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Feb 13. 2022

[소설] 나의 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 위에 있다

불편한 편의점 독후감

 코로나 시대, 마스크가 상징하는 바는 '입을 닫으라'일지도 모른다. 좋게 포장된 단어는 열고나면 오물들인 경우가 많다. '소통'이라는 포장지로 싸둔 채, 듣기보다 말하기를 우선 시하고, 자신도 손님을 상대하며, 다른이에게 못된 손님 역이 된다. 상대는 나의 맘을 몰라 준다고 하소연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상대의 마음을 알아 줄 생각을 않는다. 절대값이 존재하는 '편함의 정도'에서 누구도 나의 것을 양보하려 들지 않는다. 사회는 아슬아슬하게 이해관계로 얽혀 있으며 언제 끊어질지 모를 나약한 '실' 같은 줄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관계는 '다름'에서 시작한다. '매일 게임에 빠져 사는 아들'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엄마, 수익이 나지 않는 '편의점'에 헛된 투자한 엄마'를 바라보는 아들, 바쁘게 사업체가 돌아가길 바라는 '사장'과 적당히 조용하길 바라는 직원. 우리는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마치 영원할 것 같은 관계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득이 되지 않으면 귀는 순간 닫힌다. 부모, 딸, 친구 누구라도 그렇다. 상대만 깔끔하게 맞춰주면 무슨 일이든 수월하게 흘러 갈 것 같다는 오만은 문제가 된다. '문제를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되는데,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 사실 '나'와 다르다는 것 말고는 큰 문제가 없는 이들을 상대로 우리는 문제를 삼으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게임'에 빠져 사는 남편"을 보며 하소연한다. 건실하고 착실한 남편이라면 더 좋았을테지만, 하루종일 게임에 미쳐 사는 남편 때문에, 결혼생활이 재미가 없다고 한다. 이것은 남편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만약 부인이 남편 만큼 게임을 좋아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다. "누군가는 매일 쇼핑을 즐기는 아내"를 보며 하소연한다. 착실하게 돈을 모으고 근검절약을 하는 아내라면 더 좋지 않을지 생각한다. 이것은 아내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만약 남편이 아내만큼 쇼핑을 좋아했다면, 그 둘은 자신들의 여가 시간을 함께 쇼핑하며 즐거운 시간을 더 많이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 '잔소리하는 부모' 모든 상황은 '자신이 맞다'라는 오만에서 시작한다. 말 그대로 문제를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일들을 우리는 문제를 삼는다. 결국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닫는 일이 스스로와 상대가 편안해지는 길이다. '편의점'이라는 공간은 그 공간에서 '편의'라는 단어를 걸어 놓는다. 손님의 편의를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이름에 담고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가 '편의'를 봐주는 사람을 하대하는가. 일방향의 편의를 위해 한 쪽이 희생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언제부터 생겨났는가. 이는 당연하지 않다. 사실 변호사는 법률대리인으로 법률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제공해주는이다. 의사 또한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제공받는다. 편의점 또한 마찬가지다. 나에게 없는 능력이나 물건을 쉽게 제공해주는 이들로 그 직업에 귀천이 존재할리 없다.


 어쨌거나 내가 편안하다는 것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돈을 내니까, 내가 우위지'라고 여기는 것은 앞서 말한 것 처럼, 무지몽매의 산물이다. '돈을 내니까 우위'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서비스나 제화를 제공받는 입장에서, 자신은 '돈'보다 귀한 걸 얻어가기 때문에 지갑을 열었던 것이다. 결국 상대는 내가 가진 '돈'의 가치보다 더 '필요한 것'을 제공해준 은인인 셈이다.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된다. 냉철하지만 '사회인' 대부분은 '돈'과 '이익'에 의해 움직인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편의점'이라는 공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그중 JS(진상)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어떤 서비스업이던 감정이 부글 부글 끓어 오르게 만드는 부류가 있다. 이런 이들을 상대하는 방법에는 그를 '악'이라고 보지 않고 '불쌍하다'라고 보는 것이다. 대게 예의가 없고, 무례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에게 따끔하게 예의를 가르치려 들면 갈등이 생긴다. 또한 '왜 저렇게 예의가 없지?'하고 의문을 품는 순간에도 스트레스는 발생한다. 우리는 개짖는 소리에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구별하지 않는다. 내가 상대를 나와 같은 급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그가 나와 비슷한 예의와 매너를 가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다만,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의 급을 한참을 낮춰 본다면, 그닥 기대가 되지 않는다. 기대가 되지 않으니 스트레스는 받지 않는다. 


 소설은 느닷없이 한 노숙자가 편의점 사장의 분실물을 찾아주면서 시작한다. 편의점 사장은 노숙자에게 일거리를 제공한다. 기억상실에 걸린 노숙자는 자신의 과거가 어떤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편의점을 찾은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예의 없는 사람과 불행한 사람, 오만한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그를 찾지만 과거의 기억을 잃은 즉, 자아를 상실한 주인공(노숙자)는 상대의 거울이 된다. 자아가 없기에, 자신보다 낫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며 상대를 자신처럼 생각하고 자신을 상대처럼 맞춘다. 이런 행위는 '내가 옳다'는 무지의 반대적 행위다. '내'가 없기에, 내가 옳을 것도 없다. 상대에게 내 가치관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이런 주인공의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인사이트를 준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세상'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이는 희귀하다. 기억상실로 내가 없기에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결국 상대에게 매력을 갖게 만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드 '프렌즈'에는 비슷한 일화가 하나 소개된다. 주인공 '로스(Ross)'가 치아 미백을 하는 챕터가 있다. 너무 하얗게 미백이 된 치아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새로 만나게 된 여자와 데이트에서 입을 닫고있자, 상대는 잘 들어주는 로스(Ross)에게 특별함을 느낀다. 


 소설은 잔잔하게 흘러간다. 주변에서 있을 법한 일들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소개한다. 일본불매운동부터 코로나 사태까지, 젊은 층들이 진로에 대한 고민부터, 자영업자와 직장인의 고충까지 대한민국에 어디에나 있는 '편의점'이라는 배경을 통해 낱낱이 보여준다. 마지막에는 소설로써의 역할을 충분히하며 반전까지 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간단한 소설로 접했다가 생각할 거리를 많이 갖고가는 소설이다. 해당 소설은 '베스트셀러'로 굉장히 인기가 있다. 중학생부터 시작하여 성인까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와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계층에서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급하게 어느때라도 주변에서 돕겠다고 대기하고 있는 '편의점'은 일종의 '응급실'과도 같다. 정성껏 시간내어 방문하는 장소라기보다 급하게, 충동적으로 쉽게 들어가고 나가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야 말로 사람들의 진짜 민낮이 나오고 우리 사회의 진짜 민낮이 나오는 곳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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