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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Feb 18. 2022

[생각]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외면하는 이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9~13)_주기도문


 당신이 기도교인이건 아니건 기독교가 만들어낸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자명하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주기도문'을 꺼내든 것은 아니다. SNS도 없고 유튜브도 없고 책도 없고, 아무것도 없던 시기에 다수의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선 '믿음'이라는 매개체가 분명히 필요하다. 어찌됐건 기독교는 아주 오랫동안 그런 역할을 했다. '하나님'이라는 '신' 속에 숨겨져 있는 '진리'란 결국 '인간을 위함'에 있다. 기독교와 불교는 아주 달라 보이지만 비슷한 점이 있다. 기독교와 불교는 난 지역을 벗어나 확장해고 발생지를 훨씬 넘어서는 광범위한 지역을 포용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태어난 예수와 인도에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광범위하게 뻗어나갔다. 최초 이 종교를 믿지 않는 이들이 존재하던 땅으로 영향력이 확산되면서 '문화융합'이 일어난다. 중학교 사회교과서에서 배우는 이 '문화융합'이란 '기존의 문화 요소와 새로 전파된 문화의 융합으로 제3의 문화가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즉, 기독교와 불교는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온전하기 역사적으로 힘들다. 전파되는 과정에서 가장 쉽게 흡수되던 사상은 '토속신앙'이다. 불교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불교'에는 '윤회(輪廻)' 사상이 있다. 다만, 윤회(輪廻)라는 용어는 불교에서만 사용되는 용어는 아니다. 인도 힌두교에서도 같은 종교 용어를 사용한다. 바퀴 윤(輪)에 돌 회(廻)를 사용한 이 '윤회(輪廻)'는 '한자'를 기원으로 하고 있지 않다. 산스크리트어를 기원으로 하고 이것이 중국 표의문자인 한자를 빌리며 '의미'가 1차적으로 퇴색했으며, 다시 표음문자인 한글에 와서 완전히 '본래 의미'가 사라지고 표면만 남았다. 윤회 संसार(saṃsāra)는 빙글빙글 헤매며 도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쉽게 우리가 알고 있는 윤회는 사람이 죽으면 내세가 존재하여 다음 생에는 다른 무언가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불교의 윤회관은 다르다. 일단 힌두교의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이렇다. 인도의 몬순기는 집중호우를 통해 농업 생산량을 증가 시킨다. 인도는 적도에 인도양을 끼고 있는 대륙이다. 적도 인도양에서 머금은 습한 공기가 몬순기(6~9월)이 되면 연간 강수량의 80%를 쏟아낸다. 이런 지형과 환경의 특징으로 인도는 경작지의 70%가 천수답이다. 이 말은 농업을 위해 '소'가 중요해짐을 뜻한다. 결국 인도에서 소를 도축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된다. 고로 힌두교에서 '소'는 '윤회'와 연결을 짓고 신성함을 갖게 됐다. 힌두교에서는 어떤 존재 죽으면 다른 생물로 다시 태어난다고 여긴다. 이를 '힌두교식 윤회'라고 한다. 즉, '악마'로 태어난 누군가가 인간이 되려면 87번이나 윤회해야 한다. 마치 게임에서 레벨업 하듯, 한 단계, 한 단계 씩 윤회하며 겨우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는 인간이 되기 바로 직전 단계다. 이런 소를 죽인다면, 그는 가장 낮은 단계로 떨어져 처음부터 이 윤회의 과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석가모니가 주장한 '윤회(輪廻)'는 조금 다르다. '고다마 싯다르타'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환생'의 '윤회'에 대해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존재로 환상하는 윤회관이 아니라, '현생에서 만들어낸 행업에 대한 과보'가 돌아온다거나, '인간의 생과 사'사이에 '노와 병'이 존재하고 이것이 순회한다거나, 죽음과 삶이 순환한다 거나, 고통과 즐거움이 순환한다는 의미의 '윤회'를 설파하곤 했다. 다만 이런 싯다르타의 가르침이 '힌두'의 종교관과 만나면서 독특한 종교적 세계관이 만들어졌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싯다르타'와 같이 사후 세계에 인간이 방문한다는 지옥이나 천국에 대한 언급이 없다. 성경에도 인간들이 가는 사후 세계에 대한 언급이 모호한 편이다. 종교적 세계관은 대게 후대의 기록에서 첨언된다. 우리의 기도문이 얼마나 잘못됐기에, 예수는 '주기도문'을 외며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모범 기도문을 보였을까.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성공하게 해주세요"


애초 예수와 석가모니가 가르쳤던 기도문을 보면 굉장히 현실적이다. 특이 가장 앞서 말한 '주기도문'의 내용을 보면 그렇다. '삶에 대한 영광' 인지하라', '주어지는 식사에 감사하라',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상대의 잘못을 용서하라', '유혹에 빠지지 말고 중도가라', '탐하지말고 매사에 감사하라' 이 내용은 주기도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며, 예수와 석가모니가 가르치고자 했던 가르침이다. 마치, '신'이 심부름센터라도 되듯 욕망 덩어리를 간절하게 외는 것은 '토속신앙'에 기원한 내용이고 현자들의 가르침은 그 당시에도 다시 중심으로 돌아오라는 의미가 가득하다.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지 않은 사항들이 자발적으로 작동된다. 추앙하는 세력들은 '존경'하는 마음을 과하게 갖고 충성을 다한다. 그것이 정령 독이 될지라도, 내가 존경하는 이가 더 신성하길 바란다. 다만, 그런 잘못된 사랑 방식은 기르는 스승에게 되려 독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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