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에는 대형마트가 거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서귀포 이마트 점과 서귀포 홈플러스 정도가 있다. 서귀포 이마트는 심지어 단층이다. 2019년 통계청 기준으로 제주는 전국에서 3번 째로 자산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자산이 많은 지역 중에서도 부채는 몹시 적다. 또한 희한하게도 가구소득은 낮은 편에 속한다. 즉 많이 벌지도 않지만 빌리지도 않는 제주도민들의 소비문화와 자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동네 어르신들은 열심히 일하시면서 적은 돈을 버시고 그 돈들을 쓰지 않고 자산을 넓히시는 데 사용했다. 나는 그것을 통계로 보기 전부터 보고 자랐다.
우리 아버지는 매년 생산되는 감귤 수확을 다음 연도 수확을 위해 재투자하곤 하셨다. 일단 노지감귤에서 시설을 설비하시고 더 좋은 장비와 기법을 쓰셨다. 그러서 그런지 서귀포에는 대형마트를 찾는 도민도 많지 않지만 실제 가보면 도민보다는 외지인들이 더 많이 이용한다는 느낌이 많다. 서귀포 이마트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외출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외출하는 것을 몹시 좋아한다. 다만 아이들을 챙기고 다니기 힘들어 자주 가지는 못한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제주에 대형마트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어렸을 적을 이야기하기 앞서, 불과 얼마 전까지도 없었다. 하지만 강정 근처에 도심이 확장되어가며 패스트푸드나 대형마트 같은 편의 시설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옷이 오래되었다. 특히 하율이가 좋아하는 옷은 밑단이 뜯겨 실밥이 나와있었다. 아무래도 옷을 하나 사줘야겠다 싶었다. 하율이와 다율 이를 데리고 아미트로 갔다. 나가면 아이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하지만, 보호자는 죽을 맛이다. 둘 다 카트에 실어 놓고 다니면 얼마나 편하겠냐마는 다율이는 카트 안쪽으로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다율이는 독립심이 몹시 강한 아이다. 꼭 좌석은 조수석에 앉아 혼자서 안전벨트를 메야 직성이 풀리고 쇼핑카트는 본인이 밀어야 직성이 풀린다. 내가 조금이라도 도와 줄려 치면 몹시 정색을 한다.
다율이가 미는 카트는 저돌적이다. 지나다니는 행인을 향하기도 하고 진열된 상품으로 향하기도 한다. 그래도 아빠의 도움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는 따끔하게 혼을 낸다. 그러는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좋은 마음으로 한 외출은 '정신 수양'이 되어버린다.
이날은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했다. 에스컬레이터 사고는 종종 뉴스에서 접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같은 승강기 사고로 한 해 1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다. 어른처럼 손을 집을 수 있는 손잡이가 있는 경우에는 위험이 조금 덜 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은 휘청 거릴 때 무심고 옆에 있는 유리벽을 잡게 되고,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상대적으로 올라가는 벽을 짚은 듯 아주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에스컬레이터의 측면은 몹시 위험하기 때문에 어른이 함께 타지 않고서는 4살 아이들이 혼자 타기는 어렵다. 나는 아이들을 잘 타이르고 에스컬레이터를 태웠다. 나는 거의 성인이 다 될 때까지 에스컬레이터를 접하지 못했다. 그런 시대를 살았던 것이 아니라 그런 곳에 살았다. 가만히 서 있으면 저절로 올려주고 내려주는 에스컬레이터는 참으로 멋진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의 어원에 대해 생각이 난다. 스테이플러나 포클레인과 같이 엘리베이터는 상품명이 명사가 된 경우이다. 미국의 발명가인 엘리샤 오티스(Elisha Graves Otis)는 1853년 뉴욕에서 열린 국제 박람회에서 안전장치가 설립된 엘리베이터를 출품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으나 엘리샤의 Eli와 다용도 자동시험장비의 Versatatile Automatic Test Equipment인 'VATE'가 합쳐진 단어이지 않을까 싶다.
Google을 검색하다가 'Googling'으로 해외에서는 쉽게 대명사가 명사가 된 경우가 많다. 엘리베이터 또한 여러 가지 파생 단어를 만들어내며 elevating 고양시키다. elevate 승진시키다 등의 단어가 생겨난 듯하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뉴질랜드에서는 엘리베이터라는 말 대신 리프트(Lift)라는 말을 쓰는데 아마 영국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하율이는 옷을 사러 가자마자 별 다른 고민도 없이 옷을 하나 집어 든다. 그리고 무조건 저 옷을 입어야겠다고 확신에 찬 듯했다. 이제 문제는 깐깐한 다율이다. 다율이는 어디서 봤는제 손으로 턱을 괴어 놓고, '무엇을 입지?' 하고 혼잣말을 한다. 이 옷과 저 옷을 골랐다 놓았다를 반복한다. 4살이면 아직 쇼핑을 즐길 나이가 아니라고 확신을 했는데 다율이가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쇼핑이 체질인가 싶다.
Storage(창고)나 Stock(재고품), Stomach(위, 뱃속)처럼 채울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Stone(돌)처럼 꽉 차 있거나, 이미 채워져 더 이상 채울 업을 떼쓰는 Stop(멈추) 혹은 인생을 채워나가는 Story(이야기)처럼 Store(가게) 또한 창고형 매장을 이야기한다. 반면 shock(충격), Show(보여주다), Shot(쏘다)처럼 상품을 공격적으로 판매하는 소형 마켓을 이야기한다.
어찌 됐건 쇼핑을 즐기는 다율 이를 기다리느라 진이 빠진 하율이와 나이다.
옷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하율이는 표정이 그때의 나와 갔았던 같다. 반면 마음 것 쇼핑을 즐겼던 다율이는 표정이 매우 밝다. 돌아가는 길에는 이디야커피에서 딸기 밀크티를 샀다. 나 하나 아이들 둘이 하나를 주면 딱 맞겠다 싶어 두 개를 샀지만 나의 몫은 없었다. 저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밀크티는 원래 홍차를 주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카페인 함량이 있는 음료이다. 아이들에게 적절하지 않았는데 '정신없던 아빠의 실수'였다.
밀크티의 역사는 참 재밌다. 홍차와 우유를 섞고 설탕이나 잼 등을 섞어 먹는다. 내가 키위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그들은 집에서 종종 가볍게 먹는 듯했다. 참고로 뉴질랜드에서 카페를 가면 밀크티보다는 플랫화이트라는 음료를 자주 마신다.
밀크티에는 타피오카 펄이 들어가 있다. 타피오카는 카사바라는 뿌리식물을 이용한 재료인데 이를 물에 오랜 시간 담근 후 녹말을 추출하여 마르기 전에 천주머니에 넣어 흔들어 만든다고 한다. 천주머니에 넣어 흔들면 3~5mm의 알갱이가 되는데 이를 타피오카 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을 넣은 밀크티가 버블티이다. 버블티는 1980년대 대만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버블티를 다 먹고 나면 타피오카 펄만 얼음과 함께 남아있는데 그것을 먹어보겠다고 흡입하다가 목구멍으로 '훅'하고 들어가는 고통은 이 음료가 주는 또 다른 부가물이다. 아이들은 충분히 먹고서 나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남은 타피오카 펄만 깨작깨작 먹었다.
아이들과 함께 다니다 보면 항상 웃으면서 육아할 수는 없다. 특히 대략 1시에서 3시 사이에 아이들이 낮잠을 잘 타이밍을 놓치거나 끼니를 놓치게 되면 아이들은 영문 모를 칭얼거림을 시작한다.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안아달라고 하고 안으면 내려달라고 하고, 이리 가라고 해다가, 저리 가라고 했다가. 사람의 혼을 속하고 빼놓는다.
이런 아이들의 칭얼거림을 웃음으로 받아주다가 순간 이성을 잃을 때가 있다. '부처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성인들을 마음속으로 찾아보지만, 결국 '에라이..' 하고 화를 내게 될 때도 있다. 훈계가 끝나면 항상 후회를 한다. 사실 살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부모님과의 관계나 부부관계, 친구사이의 관계 등 멋대로 풀리지 않는 수많은 난제를 겹겹이 쌓아놓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래서 어쩔 건데?'라고 생각해보면 '그래도 어쩔 수 없지'로 끝나는 일들이다. 그런데 항상 같은 고민을 하고 산다. 항상 세 발 자전거를 타다가 처음 두 발 자전거를 탔을 때의 기억이 난다. 사촌 누나네 집에서 자전거를 빌려다 뒤에서 꼭 잡아달라고 말을 했다. '누나! 잡고 있지?'라고 하며 나 혼자 10m를 나갔을 때는 정말 내가 했는지 알 수 없는 기행이 내 뒤에 펼쳐져 있었다. 결국 자전거를 타는 일은 나의 무의식으로 넘어갔다. 이제는 음악을 들으며 타기도 하고, 딴생각을 하며 타기도 한다. 자동차 운전도 마찬가지다. 영어공부도 그렇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을 많이 쓰며 시작하지만 결국은 무의식이 되고 그저 생활의 일부로 들어간다. 육아는 사람을 대하는 연습인 것 같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고객을 상대하거나 이유 없이 화내는 남편, 갑자기 돌출 행동을 하는 친구 등 수많은 일들을 직접 겪는다.
남이 싼 변을 닦아주는 일부터 알지 못하는 짜증을 받아주는 역할도 해야 한다. 부모라는 것은 어쩌면 부모에게 저지른 죗값을 달게 받는 역할이지도 모른다.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기독교적 교리를 반박하고자 친구와 싸웠던 적이 있었다. '나는 죄 지은 게 없는데 왜 사람을 죄를 지었다 그래?'
그러자 내가 들은 대답은 지금도 가슴에 박혀있다.
'형이 태어나면서 어머니에게 주었던 출산의 고통이나 자라나면서 했던 기억나지 않는 모든 죄들도 원죄에 속해.'
부끄러웠다. 나는 지금도 종교는 없다. 하지만 기독교와 불교 모두에게서 배우는 것들이 무척 많다. 아이를 키우며 그 배움을 곱씹고 곱씹는다. 가족은 얻을 때는 마치 반쪽을 얻는 것 같지만, 잃을 때는 모든 것을 잃는 것 같은 찌 저지는 고통을 갖게 한다. 아이들이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