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와 아빠의 제주여행#23_관음사를 다녀왔습니다

by 오인환

제주에 살면서 관음사를 방문한 적은 많이 없다. 횟수로 3회 정도 되는 듯하다. 아이들과 방문한 이유는 단순하다. 주말에 있으면 아이들은 활기가 넘치고 나는 축축하고 처지는 것이 문제다. 집에서 이것저것 모두 만져보고 싶은 아이들을 쫒아다니면서 봐주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럴 바에는 일단 밖으로 나가서 아이들의 에너지를 발산시켜줘야 하는 듯하다.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면 쌍둥이의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복잡해진다. 가라앉지 못하는 여러 가지 생각과 잡음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나니다가 결국은 그 성질이 아이들에게 향한다. 그럴 바에는 조금 정적인 분위기를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선물해 주고 시기도 하다. 나는 종교가 따로 없다. 기독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다. 하지만 교회와 성당, 절이 주는 성스럽고도 차분한 분위기는 너무 좋다. 유학하던 시기 언제나 열려 있던 성당에 혼자 앉아 가만히 상념에 잠겼던 적이 있다. 앞에 있는 성모 마리아나 예수를 바라보며 무엇을 바라거나 하진 않는다. 그저 조용하게 나를 다스릴 수 있는 좋은 장소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 곳도 마찬가지다. 낯설기만 한 불교에서의 여러 신들을 쳐다보면서 나는 종교적인 느낌을 취하지 않는다.



그저 지적이는 샛소리와 가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집중을 다한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 때마다 좋은 나무 냄새가 스친다. 오랜만에 자동차 지나다니는 소리도 없는 적막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일 년 7만 원을 지불하면 즐길 수 있는 자연의 소리와는 전혀 다른 3차원 자연의 소리에 위로해 주는 이 없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이곳이 어딘지 몰랐다. 아이들에게는 종교에 대한 어떤 간섭을 하고 싶지 않다. 본인의 가치관이 형성될 쯤에 스스로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종교를 갖기를 바란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모태신앙 자다. 그의 신앙에 대해 가끔은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종교보다 다른 것들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는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일단, 모태신앙이라는 것은 부모에게 자신의 자녀에 대해 자랑스러워할 만한 부분인 듯하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직업이 정해지고 마는 일본 장인들의 가정교육에 나는 갑갑해하는 성향이 있다.


부모와 사회가 한국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사용하고 부모와 사회가 자연스럽게 한국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인의 사상을 갖고 있는 것. 그러므로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으며 당연히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사실 깨어버리기 상당히 어렵다.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습관이 없다면 상대가 갖고 있는 좋은 문화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고치기 어렵다. 너무 결국 매몰비용의 오류처럼 내가 태어나면서 '불교인'이기 때문에, 내가 태어나면서 '기독교가'이기 때문에 지금껏 살아왔던 자신의 뿌리를 바꾸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다가 올 미래를 좀먹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사실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조심스럽다. 같은 나라에 있으면서도 너무나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고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이해가 없다면 '타협'이라는 것은 존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종교를 떠나 그저 좋은 공기와 좋은 환경을 만나보는 의미로 떠난 관음사다. 관음사는 한라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제주시와 서귀포를 오고 가며 어렵지 않게 들어 볼 수 있다. 우리 외가 쪽은 천주교라고 하셨다. 어머니도 어린 시절에는 성당을 다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는 어머니 나이 20살이 조금 넘어서 부터 서울에서 옷을 떼어다가 배를 타고 제주로 들어와 옷가게를 하셨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봐도 무언가를 도전하기에 굉징하게 어린 나이다. 옷장사부터 시작해서 어런 저런 다양한 일을 해보신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시면서 정착하셨다. 농사 또한 다양하게 하셨다. '난초'를 길러 팔기도 하셨고 수박, 방울토마토, 꽃(거베라와 미니장미), 귤 등 수없이 많은 품종을 도전하시다가 이제야 겨우 농사로 자리를 잡으시었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셨던 감귤 보관 창고를 개조하여 터 낮은 집에 사신 어머니는 지극하게 '현실적'이신 성격으로 바뀌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종교에 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없냐고 물었던 내 질문에 '먹고사는 문제부터도 해결이 안 됐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실제로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자면, 나의 수능날 어머니는 교회와 성당에서 기도를 하셨고 절에 연등을 다셨다. 초코파이 하나에 종교를 주 단위로 바꾸던 나를 보며 옆에 있던 훈련소 동기는 나를 불쌍한 눈으로 봤었다. 종교가 있는 사람이 보기에 종교가 없는 사람은 '무지'하게 보인다고 한다.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이에 대해 '동정'의 시선이 생긴다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나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살면서 이처럼 '신'에 의지 하지 않는 태도는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이 없을 때, 찾을 곳이 없다는 슬픔은 떨어지는 것에 완충제 역할 하나 없이 높은 곳으로만 올라가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믿음의 문제란 쉽게 생겨나지는 않는 듯하다.


아이들과 물고기를 구경했다. 물고기는 색깔별로 다양했다. 최근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은 '보글 냠냠 요리사'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과자, 햄버거,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안 되고 건강하게 채소를 먹어야 한다고 가르쳐준다. 이 책에서 맛있게 고등어를 구워 먹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아이들에게 "음~ 맛있는 물고기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하율이는 보고 있는 두 눈을 두 손으로 틀어막는다. '불쌍한 물고기야. 뜨거운 불 위에 있어" 멋쩍게 "그.. 그러네?"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두 눈을 감지도 않은 물고기가 화로 위에서 하율이와 나를 불쌍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교육하고 있는 게 맞나?"


다시 몇 장 넘기니 다음 장에는 계란 프라이가 나온다. 그 옆에는 계란을 까고 튀어나온 병아리도 함께 있다. 아이들은 먹는 계란과 병아리가 같다고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응? 귀여운 병아리네?"라고 말했다. "계란이 병아리가 되는 거구나?"라고 무심결에 말하자 아이는 말했다. "아니야! 계란은 맛있는 거고 병아리는 귀여운 거야. 병아리는 먹으면 안 돼."


아이들은 계란도 맛있게 먹고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도 맛있게 먹는다. 하지만 꿀꿀이와 음메, 꼬꼬는 친구라고 말한다. 아이들과 함께하다 보면 되려 내 가치관에 혼란이 생긴다. 다율이 가 어린 시절부터 무척이나 좋아하는 꼬꼬가 닭고기라는 것을 언제쯤 알게 될지는 모르겠다. 알고 나면 어떤 생각을 할까?


오늘은 사실 그다지 기분이 좋은 날은 아니었다. 다만 이곳을 방문하고 많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았다가 좋지 않다가를 반복하는데, 자신의 감정에는 솔직해지되 함몰되서는 안 된다고 한다. 자신의 감정이 한없이 다운되기를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나쁜 감정이 생긴 것을 생기지 않았다고 속여서도 안된다고 한다.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긴다면, 생긴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인 뒤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한다. 오늘은 어쩌면 아이들로 인해 감정의 순환이 일어난 날이 아닐까 생각한다.


날씨가 몹시 좋다. 절 안에 카페가 있는데 딸기 스무디도 있고 카페라테도 있다. 최근에는 카페라테를 자주 먹곤 하는데 절에도 이런 카페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좋은 냄새가 나는 카페다. 사람도 없고 조용하다. 가끔 목탁 두들기는 소리와 스님들 염불 외는 소리가 스피커로 들린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이들에게 딸기 스무디를 하나 사주고 나도 유자차 하나를 마신다. 한참을 앉아 있는다.


좋은 시가 하나 있다.


마음


마음이라는 것은

좁히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고

마음을 넓히면

우주가 다 들어가는 크기지요.

오늘도 좀 크게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며 살아요.


세상 만물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한다. 길거리에 떨어진 나뭇가지는 주워 들고 짚으면 지팡이가 되고 사물을 가르치면 지휘봉이 된다. 사람을 때리면 흉기가 된다. 하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고 그 역할은 다만 사용하는 이의 목적에 달라진다. 세상 만물이 그렇다. 아주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것도 사실 따지고 보자면 내가 그것을 사용할 방법을 몰랐기 때문은 아닐까? 부정적인 감정도 사실은 모두 나에게 득을 줄 수 있는 좋은 도구일 뿐이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독이 되기도 하고 득이 되기도 한다.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치명적인 '독' 중 하나라는 '보톡스'는 단 200g만으로도 인류 전체를 죽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이용하여 미용으로 활용한다. 세상에 가장 독한 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자면 절대적이진 않다.


만물이 절대적이지 않다. 가장 치명적인 무기인 '핵'은 지금껏 죽인 사람의 숫자보다 살린 사람이 더 많단다. 가장 치명적이고 독하다는 것에도 반전이 있는데 내가 말하는 악과 부정적인 것들은 과연 절대적인 것인가?


20210314%EF%BC%BF103210.jpg?type=w773



20210314%EF%BC%BF103257.jpg?type=w773



20210314%EF%BC%BF103629.jpg?type=w773
20210314%EF%BC%BF103932.jpg?type=w773
20210314%EF%BC%BF104123.jpg?type=w773
20210314%EF%BC%BF105153.jpg?type=w773
20210314%EF%BC%BF105106.jpg?type=w773
20210314%EF%BC%BF105241.jpg?type=w773
20210314%EF%BC%BF105508.jpg?type=w773
20210314%EF%BC%BF105525.jpg?type=w773
20210314%EF%BC%BF110257.jpg?type=w773
20210314%EF%BC%BF112936.jpg?type=w773
20210314%EF%BC%BF113455.jpg?type=w773


keyword
이전 24화쌍둥이와 아빠의 제주여행#22_아이와 정말 즐거웠던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