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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y 24. 2022

[생각] 다독하는 이유_강의 흉내내는 다율이

 어린 시절에 '비디오방'이 있었다. 우리 집은 워낙 가난한 탓에 '비디오 재생기'가 없었지만 사촌 형의 집에는 비디오 재생기가 있었다. KBS와 MBC 2채널만 나오는 우리집 TV앞에서 '눈물' 흘릴 일은 흔치 않았다. 방송국 편성 시간에 '뉴스'나 '드리마', '영화'에 따라 슬픈 드라마를 보면 눈물이 나고 재밌는 영화를 보며 웃기도 했다. 다만 '슬픔'만 따로 떼어내어 가질 수는 없었다. '사촌 형'네 비디오 재생기는 정말 놀라웠다. 언제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틀어 볼 수 있었다. 슬프고 싶다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재생하여 눈물을 흘릴수 있었고, 재밌고 싶다면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같은 영상을 틀어 놓고 웃을 수 있었다. 허름한 동네는 중년의 사장 님이 운영하시는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하얀색 런닝셔트에 왼손에는 부채 아니면 파리채가 들려 있었다. 세상 모든 영상들이 다 그곳에 모여 있었는지 '코미디', '멜로', '액션' 심지어 '성인물'까지 세로로 꽂혀 제목을 '메롱'하고 노출 시키고 있었다. 손님 들은 집게 손가락으로 제목을 훑다가 마음에 드는 장르를 골라갔다. 비디오 대여료는 2천 원 정도였다. 수삼일 간, 같은 영상을 마음대로 돌려 볼 수 있었다. 게중에는 '분실'했다고 하여 아예 2만 원인가 정도에 비디오를 구매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다 비디오를 찾게 되면 그 비디오는 영구적으로 돌려 봤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면 끊임없이 '우울한 과거'가 재생된다. 대여 반납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며칠이건 연체해도 좋다는 듯 영상을 돌려본다. TV화면을 끄고 비디오를 제자리로 돌려 놓기만 하면 되는데 이들은 슬픈 장면을 재생하고 또 재생한다. 남들은 '크리스마스', '새해', '생일' 다양한 '오늘'을 맞이하는 데도 그들은 이미 지나버린 영상을 보고 또 본다. 그리고 울고 또 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영상은 마치 화면 속 캐릭터를 속성으로 사랑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어김없이 이미 촬영된대로, 대본에 쓰여진 대로, 카메라에 찍혀진 대로, 영상 속에서 존재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일생에 몇 번 맞이해도 굉장한 스트레스다. 그것을 꾸준하게 재생하여 스스로 스트레스를 부여 받는다. '누군가'는 비현실적인 세계에 빠져 현실 감각없이 '망상'만 키워간다. 온갓 음모론이며 세뇌와 선동에 쉽게 물들고 마치 선전 영화 감상하는 사회주의 '인민'처럼 반복 시청한다. '재미'로 시작했으나 반납일은 이미 한참을 놓쳤다. 본 장면을 보고 또보고 다시 또본다. 그렇게 사리분별 능력을 잃는다. 어느 누군가는 '성도착증'에 걸린 사람처럼 '성인물'에 빠진다. 한 인간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공감하는 모든 이야기는 생략하고 자극적인 장면만 반복해 본다. '성'에 대해 잘못된 관념이 학습된다. '영화'나 '음악', '책' 모두 마찬가지다. '희노애락'이 번가르며 윤회하는 우리 삶에서 일부의 감정을 극대화하여 추출해 낸다. 마치 '생선 한마리'를 추출하여 극도로 순도 높은 오메가3 몇방울 채취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얻고 난 뒤, 나머지는 불순물로 취급한다. 고열량 식품은 그렇게 분쇄기로 갈려진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순도 높은 감정만 모아서 투여한다. 애초에 '슬픔', '기쁨', '쾌락', '증오'의 감정은 우리 몸에 극적인 자극을 준다. '양귀비'처럼 말이다. 양귀비는 잘 정제하면 아편이 된다. 아편을 잘 가공하면 '헤로인'이 된다. 빨갛게 핀 '양귀비'는 얼핏 장미보다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에 매료되면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것은 중독이 되고 끝은 파멸이다.


 사람은 물론, '대청제국'도 무너뜨렸다. 우리 인생에는 '슬픈 드라마' 뿐만 아니라 '코미디'와 '다큐멘터리', '기쁨' 등 다양한 감정이 있다. 비디오 방에도 분명 여러 종류의 장르가 있었다. 다만 우리는 그중 가장 강력하게 우리를 매료시키는 '양귀비'를 찾아서 깨끗하게 정제하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투여한다. 슬픈 영화를 24시간 틀어놓고 수도꼭지처럼 울고 있는 사람은, 사실 슬픈 일이 있어 우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영화감상'이라는 고상한 취미를 즐기는 사람일 뿐이다. 다만 '죽음', '질병', '이별' 등의 고통을 맞이한 사람과 같은 크기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것은 학습된다. 무의식은 그래서 무섭다. 모든 감정은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져야 한다. 비디오 대여점의 규칙은 수삼일 안에 빌린 비디오를 반납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반납하지 않으면 연체가 발생한다. 실제  십수 년 전, 어떤 이는 채권 추심업체로부터 오래 전 빌린 2개의 비디오 때문에 0300만원이 넘는 고지서를 받았다. 이는 허무맹랑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감정도 그렇다. 감정은 머물고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일어났다가 사그러든다. 그것에 어떤 감정이던 그렇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붙잡고 있거나, 미래에 있을 걱정을 만들어 붙잡는 것은 '연체' 감정 사용료를 납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극도로 정제하면 거기에는 '중독성'과 함께 '쾌락' 그리고 '파멸'이 숨어있다. 


 어떻게 그처럼 끊임없이 소재가 생겨날 수 있냐고 누가 물었다. 이에 최근 글을 읽다가 대답거리를 찾았다. '생각할 거리가 많으면 적고, 생각할 거리가 없으면 읽는다.'

 내가 읽은 책은 책꽂이에 꽂힌다. 죽처럼 걸쭉한 나무 갈린 물에 화학약품을 첨가하면 종이가 된다. 그 위에 검정색 착색제를 뿌리는게 이 제품을 만드는 방법이다. 아마 '강아지'나 '고양이'의 눈에는 두툼한 뭉텅이겠지만 그 안에는  세계가 녹아있다. 책이 대략 4천권이다. 권당 대략 300쪽이다. 페이지는 대략 60만 쪽이고 대략 10억 개의 단어가 있다. 이것을 이렇게 저렇게 조합하여 엄청나게 많은 세계가 만들어진다. 먼저 읽었다고 다음에 읽을 내용이 빛 바라지 않는다. 아버지가 보던 글을 아들이 봐도 전혀 촌스럽거나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쉽게 말해 '남녀노소'가 모두 처음처럼 된다. '다독'하는 이유는 그렇다. '한 권'을 깊게 보는 것도 좋은 독서법이다. 심지어 세종대왕 님의 기록에서도 그런 습관을 찾아 볼 수 있다. 다만, 이는 위험할지도 모른다. 나는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을 무릎을 치며 읽었다. 그리고 재독했다. 그 책이 말하는 바는 마치 양귀비처럼 내 안에 들어와 앉았다. 반일종족주의의 반댓쪽 주장인 '신친일파'라는 책이 나오고 이 책도 정독하고 다시 재독했다. 한 권의 책을 깊이 있게 읽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다만 그 책이 '진리'에 가깝다라는 착각에 빠져들 위험도 충분하게 있다. '사피엔스'라는 책은 심지어 '원서'로 2번, 한국어로 3번을 재독했다. 이 책이 진리인 것처럼 느껴지는 바가 생겼다. 그래도 그렇지 않다. '더 시크릿'이라는 책은 심지어 최소 10권 이상은 구매했던 듯하다. 정독하고 재독하고 심지어 영상도 수 십 번을 돌려봤다. 그것이 '맹신'을 만들어낸다. 내가 아는 세상만 '세상'이라는 믿음은 '배타적'인 성격을 만든다. 하얀 천에 약간의 이물감은 씻어내기 쉽다. 다만 그것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묻힌다면 씻기 어렵다. 누군가는 빨간색이, 누군가는 파란색 천이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빨간색도 파란색도 되고 싶지 않다. 그저 하얀색으로 남아서 언제든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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