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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Jul 18. 2022

[소설] 지구를 떠나서도 수레바퀴 같은 인간의 역사

파피용 독후감

 소설 '파피용'은 지나고 보니 '화성 이주 계획'을 발표했던 일론머스크의 스페이스x를 닮았다. 황당무계한 소설같은 일이 이미 벌어진 현실은 2013년에 먼저 쓰였다. 괴짜 재벌의 우주사업이라는 소재가 별로 새롭지 않은 오늘이다. 얼마 전까진   '외계로 이주 계획'이라는 말은 '사업'에 결코 붙질 않았다. 수익성이 보장되야 움직이는 '경제'와는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황당 무계한 소재는 끓는 물의 개구리처럼 '이 정도까지는 납득 가능해?'라고 묻고, 다시 '이 정도 까지는 납득 그낭해?' 하며 점차 납득 불가능한 결론까지 납득시킨다. 파피용은 '나비'라는 뜻이다. 멋있는 불꽃을 뿜으며 대기를 향해 쏘아 올라가는 로켓과 다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선택한 우주 유영 방식은 '나비처럼'이다. 결코 자연스럽지 않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고 착각하는 인간의 무지가 지구를 떠난다. 가장 지구다운 곳을 떠나 가장 지구 닮은 행성으로 나아간다. 머나먼 행성으로 떠나는 모습은 '탐험'이나 '호기심'이 아니다. 먼저 '생존'과 '탈출'에 가깝다. 한 세대에 도달하기 어려운 곳으로 떠나는 여정은 탑승자를 가장 잘 알아야 한다. '인간'이 누구인지 분명해야 그들을 목적으로 도달하게 할 수 있다. 인간은 새로워 질 수 있는가. 인간은 새로운 장소를 떠나는 중간에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도착하고도 그랬다. 떠나는 우주선에서 사람과 사람은 사회를 만든다. 예전 우리 인류가 겪었던 바보 같은 역사를 반복한다. 사실 이것은 '우주선'을 타고 있는 이들의 바보 같음이 아니다. 지금도 교과서에 적혀 있는 수많은 바보같은 역사를 뒤로 하고 역사는 다시 어제를 반복한다. 사람은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 혹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한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 듯 정해진 수순으로 그냥 따라가는 느낌이다.

 자동차 운전을 배우면 신경은 발가락 끝과 머리카락 끝까지 뻗친다. 온 신경에 집중하다보면 주변에서 떠벌거리는 소리나 음악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되려 모든 것에 집중하기에 모든 신경이 조화롭지 못하고 따로 논다. 오른 발은 얼마만큼의 무게로 브레이크 패달을 밟아야 하는가. 핸들을 쥐고 있는 손의 각도는 어때야 하는가. 다만 이게 익숙해지고 나면 운전을 위해 어떤 동작을 취해야 하는지 계산하지 않는다. 그저 머릿속 '자동시스템'에 맡겨 작동한다. 커피자판기에서 버튼을 누르면 커피가 나오듯, 당연한 수순이다. 그래야 해서 그렇게 된다. 마치 도미노블록처럼 앞 블록이 넘어지면 당연히 뒷 블록이 넘어진다. 상대가 소리를 고래 고래 지른다. 듣고 있는다. 이런 상황이면 커피자판기 버튼처럼 '함께 소리지른다'라는 옵션을 사용한다. 반자동이다. 어쩌면 자동이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고 한다. 웃고 있으면 우리는 저절로 '웃는 버튼'을 누른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If 수식처럼" 입력값에 출력값을 적당히 자동으로 뱉는다. 이것을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 우리 인간은 입력값에 적당한 출력값을 내뱉는다. 역사적으로 잘못됐다는 인식을 하고 있더라도 같은 상황에서 같은 값을 내뱉는다. 알맞은 해결책이 아니란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 주체하지 못하고 본능을 따라간다. 그렇다. 본능이다. 태초의 우주가 한 점에서 시작하여 '빅뱅'하고 난 뒤, 퍼져나가는 방향성과 관성을 가지는 것처럼 마치 정해진 수순대로 움직인다. 그래프를 진행할 때 어떤 모양이 나올지는 함수갑을 알면 추론 가능하다. 이처럼 전해진 관성에 맞춰 지속하면 도달할 미래를 아는 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함수값이 변칙적이면 운명이 정해졌다고 볼 수도 없다. 어리석게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우주선 속의 인간들은 태초에 입력된 함수값을 그대로 유지하다. 진행 시키면 진행 시킬수록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 가능하다.

 소설 속 이야기지만 전혀 소설 속 이야기는 아니다. 2번의 세계 대전과 냉전을 더불어 불필요한 대립이 모두에게 옳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 투입값에 적절하게 맞는 출력값을 내뱉으며 우리는 같은 역사를 반복한다. 소설 속에서는 도시 규모가 되는 우주선 속에서 인간은 작게 지구의 역사를 반복한다. 규모를 작게 하더라도 시간과 장소를 바꾸더라도 우리는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한다. 이것은 물방울을 둘로 쪼갠다고 하더라도 그 속의 원자나 분자가 달라지지 않는 것 처럼 속성이다. 인간 속성의 디폴트 값은 하나를 둘로 나누던, 둘을 셋으로 나누던 종이컵에 담던, 유리컵에 담던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셋이 모이면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넷이 모이면 마치 본능처럼 짝을 짓기 시작한다. 편을 가르고 자기쪽과 유대하고 상대쪽과 대립한다. 소설의 후반부에는 성경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연출한다. 겨우 도달한 인간 둘은 도달한 행성의 아덴 동산으로 뛰어 간다. 그들은 마치 새로운 행성에 와서 새롭게 시작할 것 같지만 지구의 처음과 끝을 똑같이 복사하고 붙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의 해석은 독자에 따라 다르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누가 읽거나 인간 본성이 책에 담겨져 있다는 것은 다름없을 것이다. 생각없이 읽다가 생각이 깊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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