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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ug 01. 2022

[역사] 교과서를 읽었다면 필독할 다음 도서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독후감

 미국 대선은 조금 독특하다. 각 주에서 연방 하원과 상원 인원만큼 선거 인단을 선출한다. 그렇게 하원 의원수 435명, 상원 의원 100명을 합하여 535명을 뽑는다. 여기에 워싱턴 DC의 선거 인단 3명을 더하여 총538명의 선거인단을 선출하고 대통령 선거를 한다. 50개 주에서 하원은 인구비례로 선출하고 상원의원은 주마다 각각 2명씩 동일하게 선출한다. 즉, 선거인단이 3명이라면 그곳은 상원 2명과 하원 1명을 선출한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중부에 있는 거대한 몬타나주는 뉴욕주보다 2.7배 큼에도 선거인단이 3명이다. 반면 뉴욕주는 29명이다. 미국 대선에 관한 뉴스를 보자면 간단히 색을 통해 양당의 지지율을 표기하는 상황을 보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온통 붉은색을 띄고 있는 지도를 보게 됐지만 우리는 '바이든'이 트럼프를 이겼다는 상황을 보게 됐다. 얼핏 이해하기 어렵지만 거대한 땅에 적인 인구가 산다면 그곳의 영향력은 적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영토 위에 색깔로 표기한다면 넓게 보이는 부분의 영향력이 쉽게 크다고 착각한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지만 사실이다. 몬태나 주에는 인구 100만 밖에 살지 않는다. 뉴욕주는 2.7배 작지만 대략 2천 만 명 가까운 인구가 산다. 영토를 통해 영향력과 힘을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지 알 수 있게 만든다. 중국의 한나라의 영토는 명목상으로 대륙 전체라고 표기하지만 실제 고대국가의 통치령이 대륙 곳곳에 미치지는 못했다. 거의 대부분의 인구는 중국 북부와 허베이성, 허난성, 산둥성 위치에 몰려 있고 중국 영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장강 이남의 영토에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았다. 중국의 역사는 의외로 과대하게 포장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실제 중국 역사에서 한족 왕조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 중국은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받길 수차례 했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서 '원', '청'을 포함한 대부분의 역사도 현대 '한족'의 역사로 착각한다. 다만 중국은 '영토 중심적 사관'을 가지고 있다. 즉, 중국의 입장에서 '영토 중심적 사관'을 포기한다면 역사의 절반을 잃는 셈이다. 이런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의 차이로 중국은 소수민족을 포용하기 위해 고구려에 대한 역사공정이 피치 못할 내정 문제가 됐다.

 지금은 수출과 수입이 자유롭지만 조선의 경우는 모든 무역을 통제했다. 이런 통제 사회를 두고 사람들은 '조선의 폐쇄성'을 이야기 할 수도 있다. 다만 조선이 무역을 금지하는 데이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조선은 '농업국가'다. 조선의 주생산품은 '쌀'이다. 당시의 '쌀'은 지금의 '쌀'과 다른 자원이다. 현대의 '전기'나 '석유'와 같이 생산성을 위한 '에너지 자원'이며 '물가'와 '인건비'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자원'이었다. '무역'을 하기 위해 조선이 '세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물건은 대게 '농산품'이다. 농산품이 반출되면 보통 쌀값 폭등으로 인해 인건비와 물가가 올라간다. 이처럼 농업국가가 함부로 개항을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실제 조선은 '강화도 조약'에 의해 개항하게 됐으며 얼마 뒤에 국권을 잃었다. 그렇다면 이런 무역은 전혀 불가능 했을까. 그렇지 않다. 조선은 국가가 직접 무역을 관리했다. 흔히 '조공(朝貢)을 바친다.'라는 말을 한다. 흔히 조공은 스스로 약탈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동아시아 중국 주변국이 조공(朝貢)을 보내면 중국에서는 그에 대한 답례로 '선물'을 되돌려 보낸다. 조공을 많이 보낸다는 것은 '수출'이 활발해졌음을 의미한다. 실제 중국에서는 '조선'이 조공을 너무 많이 보내서 중국이 선물을 보내는 일에 부담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조선 조정에 조공을 그만 보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사회의 관례였다. 실제로 '조공을 받치거나 선물을 내리거나' 언어의 차이일 뿐이지 give 와 send 일 뿐이다. 마치 '주다'와 '드리다'의 차이일 뿐이다. 행위와 의미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고 단지 언어가 '관계' 설정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나라도 60년 간 흉노와 비단에 식량을 바쳤다는 것을 보면 중국이 꼭 당시 세계의 중심인가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도 있다.

 유럽의 미술은 19세기 중반에 정밀 묘사와 명암법을 활용한 작품이 많았다. 당시 유럽은 일본에서 도자기를 수입했다. 도자기는 오랜 기간 배를 타고 운송해야 했고, 도자기가 깨지지 않게 목판화가 프린트된 포장지로 쌌다. 이 목판화에는 일본의 서민 생활을 기조로 제작된 그림들이 다수 있었는데 색체가 화려하고 선이 단순했다. 이를 '우키요에'라고 한다. 유럽의 미술가들은 이 우키요에의 강렬함에 매료되어 이를 모방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현상을 '자포니즘(Japonisme)'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굉장히 열광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무겁고 우울한 그림을 그리는 평범한 화가였으나 '자포니즘'의 영향을 받은 후 부터 역동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반 고흐'다. 그 외로 모네, 마네, 고갱, 르누아르 등도 자포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이 자포니즘이 '인상파'를 비롯해 '아르누보', '드뷔시'등 인상주의 음악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이렇게 미술사에 커다란 영향을 줬던 일에는 '도자기'가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어째서 일본은 경제적 도약을 할 수 있었는가. 이 쯤되면 대략적인 인과관계에 대해 연결 시켜 볼 수 있다. 이를 극도의 억지라고 할 수도 있으나 어쨌건 임진왜란 이후 다수의 조선 도공들이 일본에 넘어간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일본의 도자기 문화를 서양으로 전파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이 후 일본은 경제적인 도약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런 일을 두고 조선이 일본의 성장에 적극 기여했다고 볼 수는 없다. 조선은 그 전에도 훌륭한 도공들이 있었음에도 이를 활용하지 못했고 그 이후로도 활용하지 못했으므로 사실상 '지나고 나니, 깨닫게 되는 걸 보면, 콜럼버스의 달걀과 다르지 않다. 일본이 하고 나니, 괜히 우리가 우쭐해지는 걸 보면 시기심이 아니라, 깨달음을 키워야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물론 훌륭하지만 그 밖에 시야를 넓힐 수 있는 다양한 독서가 필수적이다. 그 독서로 '김종성'작가의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를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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