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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ug 16. 2022

[철학] 김춘수의 '꽃'과 같은..._오십에 읽는 장자

 중국 고대 미녀 중 모장(毛嬙)과 여희(麗姬)가 있다. 남자들은 그들을 아름답다고 했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고 도망가서 숨는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조차 모두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에게는 그럴 수 있고, 누구에게는 그러지 않을 수 있다. 사실상 세상 만물이 모두 그렇게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게으른 사람'도 '덜 게으른 사람' 옆에 '게으른 사람'이지, '더 게으른 사람'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키가 큰 사람'도 '키가 작은 사람'에 비해 키가 큰 것이지, '더 키가 큰 사람' 옆에서 그러지 않다. 이렇게 보면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면 저렇게 보이는 것은 '어떻게 보는지'의 문제이지, 실재하는 가의 문제는 아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은 주체가 그렇게 보고 있을 뿐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에 명확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기본 원리는 '모호함'이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곳을 '지구'라고 부른다. 자, 그렇다면 지구란 무엇일까? 현재 국제적으로 지상 100km이상을 우주라고 정의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99.999km까지는 지구이고 0.001km 이후는 우주인가? 99.999km에 한없이 가까워지며 100km에 근접하다가 명확하게 우주로 떨어지는 접점을 '미분 방정식'으로 계산해야 할까. 태양의 가장 상층 대기에는 '코로나' 빛이 뿜어져 나온다. 울퉁불퉁하고 모호한 가스 중, 명확하게 태양과 태양이 아닌 구분선을 짓는 것은 가능할까? 물질의 최소 입자를 '원자'라고 한다.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뤄진 '원자핵'이 있고 그 주변에 '전자'가 있다. 전자는 '원자핵' 주변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따지고 보자면 '양자역학'처럼 '그럴 수 있고, 아닐 수 있다.' 이런 모호한 관념이 근현대 동양에서는 '터무니없는 말장난' 처럼 느껴졌으나, 서구 과학에 가서는 해결하지 못한 과학 현상이 됐다. 원자핵 주변에 있어야 하는 '전자'는 원자핵 주변에서 있을 가능성이 높고 멀어질 수록 가능성이 낮다. 마치 '모호하게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처럼 뭉게 뭉게 어딘가에 존재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명료'하지 아니하다. '딱'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시대에 '장자철학'은 '적절한 브레이크'를 밟는다. '나쁜 사람', '나쁜 상황', '좋은 사람', '좋은 상황', '게으른 사람', '부지런한 사람' 모든 것은 명료하게 떨어지는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있다. 

 '어느 날인가, 장자는 꿈을 꿨다. 꿈에 나비가 됐다. 날개를 활짝 펴고 펄럭거리면서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았다. 나비는 정말 자신이 '나비'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장자임을 잊었다. 그러다 불현듯 꿈에서 깼다. 깨어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니라 장자였다. 장자는 생각했다. 분명 꿈에서는 나비였다. 그때는 자신이 장자임을 몰랐다. 지금은 분명 '장자'라고 생각하고 '나비'가 아니라고 여긴다. 과연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 것인가, 장자가 나비 꿈을 꾸는 것인가,'

 그렇다. 삶은 모호하다. 외부와 내부는 사실상 얇은 눈꺼풀 사이로 나눠진다. 눈을 감으면 모든 세상과 차단되고 내부 세계로 들어선다. 머릿속에 담겨져 있는 말은 안에서 머물기도 하고, 입밖으로 내뱉어지기도 한다. 이분적이지만 완전히 다르고 완전히 다르지만 아주 가깝다. 가수 '장기하' 님의 노래 '부럽지가 않아'에 이 철학이 들어 있다. '너에게 십만원이 있고, 나에게는 백만원이 있어, 그러면 상당히 너는 내가 부럽겠지...(중략)... 세상에는 천만원을 가진 놈도 있지', 이 노래에는 십만원을 가진 자와, 백만원을 가진 자, 천만원을 가진 자가 등장한다. 그러나 결국 최종 승자는 천만원을 가진 자가 아니라 '부러움을 모르는 자'다. 타겟을 언제나 명중시킬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리 해도 타겟에 명중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 승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타겟을 없애버리면 된다. 이 부분은 '장자' 철학이 '노자'나 '공자'와 갈리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굳이 어떤 것이 되거나 어떤 걸 하거나의 것을 내려 놓는 것이다.

 모두가 100점을 목표로 활을 쏘는 경기에서 과녁을 향하지 않고 그냥 재미로 쏘는 것. 그것은 때로 중요하다. 100점을 맞추면 활쏘기 경기에서 이길 수 있지만, 그냥 재미로 쏘는 것은 인생이라는 경기에서 이길 수 있다. 인생에서 과녁에 100점을 맞추는 성취는 '재미'있는 여러 놀이 중 하나일 뿐이다. 관점을 바꾸면 상황은 언제나 역전된다. 규칙을 따르면 '1등'이 될 수 있겠으나, 게임의 목적은 1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즐기는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제자가 물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대답했다. 인생은 의미가 없다. 인생은 그냥 우주처럼 '공'하게 놓여진 '빈 여백'일 뿐이다. 제자는 '인생'은 '돈'과 '성공'이라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고 했다. 인생의 목적은 과녁 중심에 화살 촉을 꽂아 놓는 것과 무관하다. 마찬가지로 상대의 골대 그물망에 골을 흔드는 것도 목적이 아니다. 남들이 갖지 못한 '통장 잔고'를 쌓아두는 것도 아니며,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건물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아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로 부터 '대우'를 받거나, 그저 이름이나 존재만으로 위협감을 내뿜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저 매일 아침 샴푸를 짝수로 짜서 쓰는 것 만큼이나 의미없는 의미들이다. 장자는 이 모호함을 이야기한다. 50이 되지 않는 나이에 50을 넘은 김범준 작가 님의 글을 읽었다. 사실 책이 담은 이야기를 많이 하진 못했으나, 나이와 상관없이 어느나이라도 공감될 수 있는 여러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무언가를 하는 것도 사실은 모두 의미를 부여하기에 의미가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김춘수' 시인의 꽃이 떠오른다. 그의 시가 얼마나 철학적인지 되뇌일때마다 소름 돋는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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