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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ug 18. 2022

[과학] 왜 걸어야 하는가_걷기의 세계

 구로디지털단지 3번 출구에 서 있었다. 스마트폰 배터리는 7%였다. 지갑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원시인처럼 서 있었다. 집은 신논현역 뒷 편, 시간은 새벽 1시. 방법을 고민했다. 새벽 1시, 깜깜한 밤에 도움 받을 수도 없는 시간. 걷기 시작했다. '동서남북'도 모르고 걸었다. 북쪽으로 올라가니 '대림동'이 나왔다. 한참을 걸어 '보라매 공원역'을 스쳐 지나갔다. 엄청나게 많은 중국인들이 있었다. 서울에서 '대림동'을 밤에 걷는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촌놈'은 몰랐다. 중국어로 된 간판과 중국어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런가보다 하고 걸었다. 계속 걸었다. 날씨는 싸늘할 만큼 추웠는데 택시가 옆으로 지나가도 잡질 못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 봤다. 배터리는 5%로 떨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야속하게 배터리는 떨어져 있었다. 일단 끄기로 했다. 걸었다. 다시 걸었다. 얼만큼 걸었는지 모르겠으나 신길 초등학교를 지났다. 동서남북도 몰라 같은 길을 몇 바퀴 돌았다. 신길초등학교를 지나고 걷고 걸었다. 동쪽으로 가야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감각도 없이 그냥 걸었다. 동작구청을 지났다.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스마트폰을 켤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시간이 너무 궁금했다. 스마트폰이 켜지는 동안 사용되는 배터리가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4%. 시간만 대충 확인하고 껐다. 계속 걷는다. 차도 점점 없어진다. 강남구 방향으로 가야한다. 표지판을 본다. 없다. 한참을 더 걷는다. 꽤 큰 도로를 만났다. 이 도로를 따라가면 될 것이다. 걷고 걷고 걸었다. 이쯤되면 도착해야 한다. 그것이 '상황'이 내려 줄 수 있는 인도적인 결론이다.

 구로디지털단지 3번 출구에 서 있기 2시간 쯤 전, 500cc 맥주컵을 들이키고 있었다. 목구멍을 따갑게 스치고 지나갔던 흔적이 벌써 방광에 도달했다. 비어있는 화장실 어딘가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불 꺼진 상가 건물을 살핀다. 문이 닫혀있다. 아닌 척하며 두어번 문을 당겨본다. 잠겨 있다. 평소 흔하게 보이던 화장실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냥 조금 더 걷는다. 방광에 차 있는 소변이 땀으로 배출되길 바랬다. 날씨는 더운데 땀이 났다. 흑석동을 지났다. 소변보다 급한게 생겼다. '잠'이다. 어딘가 그냥 따뜻한 장소에서 쪽잠을 잘까 생각했다. 나름대로 길이 나올 때마다. 오른쪽과 왼쪽을 임의로 선택했다. '강남구 방향으로만 가면 된다' 한참을 가다보니, 깅거나는 곳은 '한수공원'이다. 분명 일관적인 방향으로 가진 않아보였다. 그래도 계속 갔다. 동작대로와 이수고가를 봤다. 스마트폰을 켰다. 서울 지도를 보고 싶다. '스마트폰 배터리 2%' 네이버에서 서울지도를 검색했다. 바로 껐다. 생각이 든다. '좀 전에 7% 였을 때, 뭔가 현명한 방법을 생각했어야 했다. 늦었다 여겼다. 걷고 걸었다. 방향이 잘못됐다. 내가 만난 곳은 '사당역'이다. 확실하건데, 반도 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보니, 해 뜨기 전에 도착하기는 무리다. 속도를 냈다. '방배역'을 만났다. 방향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빠른걸음으로 서초역을 지났다. 걷고 또 걷는다. 멀리서 부터 '강남역'이 보였다. 뛰다시피한다. 강남역에 도착했다. 술은 이미 깼다. 시간을 살폈다. 시간은 새벽 5시 반. 다리는 감각이 없었다. 걷다가 뛰다가 반복했다. 스마트폰을 켜면 1초 화면을 보여주다가 꺼저버린다. 어느 정도가 되니, 아침을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들과 나는 다른 목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신논현 3번 출구 방향으로 뛴다. 하얗고 구멍이 송송 뚤린 이상한 건물이 보인다. '드디어 도착이다' 더 뛴다. 논현초등학교 근처에 도달한다. 골목 골목으로 들어간다. 시계를 보니 6시가 넘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출근했다.

 정확하진 않으나 대략 6시간은 넘게 걸었던 기억이 있다. 그날 직선 방향으로 가도 구로에서 강남은 도보로 4시간이다. 잘은 모르지만 직선 방향은 아니었다. 위로 아래로 좌로 우로 왔던 길과 갔던 길을 몇 번을 반복하며 갔다. 군에 있을 때, '철야행군'을 했던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잠을 자지 않고 걷는 행군이다. 처음 걸을 땐, 오만가지 생각을 한다. 주변 풍경도 보이고 옆에 전우와 이야기도 한다. 어느정도 지나면 모두가 말이 없어진다. 머릿속으로는 지난일을 떠올리고 앞으로의 일도 떠올린다. 몸이 고단한 건 없다. 어느 정도까진 힘들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비가 온듯 무감각해진다. 다리는 자동으로 걷고 있다. 앞 녀석의 말 뒷꿈치만 보고 걸어간다. 이후에는 무념 무상이다. '처벅 처벅' 리듬에 멍 해진다.

 싱가포르에서 수출 바이어를 만났다. 잘 성사된 계약에 저녁에 호텔 밖으로 나온다. 걷는다. 한참을 걷는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적어도 4~5시간을 걷는다. 싱가포르의 구석 구석과 건물 내부와 외부가 모두 기억이 난다. 어느 거리를 걸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기억이난다. 뉴질랜드에서 걸었던 적이 있다. 한참을 걸었다. 이때도 5시간은 족히 걸었다. 웬만하면 걸어서 넘을 일이 없다는 '브릿지'를 걸었다. 오클랜드 중심에 있는 '스카이타워'가 보일 때까지 걸었다. 시드니를 걸었던 기억도 있다.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의 구석과 구석을 걸었다. 태어나서 보지 않을 골목과 사람을 샅샅이 봤다. 네이피어와 와카타네, 기스본, 랑기오라, 크라이스트처치를 걸었다. 각 도시마다 4시간 이상은 걸었다. 베트남 다낭과 푸켓도 수 시간씩 걸었다.

 걷기의 매력은 그렇다. 충분한 시간이다. 차를 타고 지나간 곳은 기억에 잘 남지 않지만, 희안하게 한 번만 걸었던 곳이라도 그곳은 샅같이 기억에 남는다. 잡생각도 서서히 정리된다. 걷기는 '리듬'을 만든다. '반복적인 리듬'은 '호흡'을 안정되게 한다. '명상'과 같은 효과다. 단순한 운동은 사실 신체보다 정신을 건강하게 만든다. 숨이차게 뛰는 '신체 운동'이 아니라 '생각하게 하는 '정신 운동'이다. 멍게는 적당한 장소를 찾기 전까지 뇌를 가지고 있다가 적당한 장소를 찾으면 자신의 뇌를 먹어버린다. 에너지 소모가 큰 뇌를 가장 먼저 없애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상에서 가장 지구력이 강한 동물이다. 결국 '뇌'라는 기관은 생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사피엔스가 이처럼 높은 지능을 갖게 된 이유는 꾸준한 '걷기' 때문이다. 뇌는 그 밖에 사회적 발달도 키운다. 누군가와 걸으며 대화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호흡의 리듬을 함께 하는 것이다. 둘은 같은 호흡으로 대화한다. 함께 걷는 이와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어야 하고, 호흡이 같은 이들은 심장박동을 함께한다. 니체는 걸으며 생각한 것만이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걸으며 생각한 것만이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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