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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ug 19. 2022

[소설] '있다'는 믿음_마녀는 꿈을 지킨다

 '산타 클로스'가 있나. '귀신'은 있나. '외계인'은 있나. '신'은 있나. 정답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본래, 있다 믿으면 있고, 없다 믿으면 없다. 발트 3국 중 최북단에 위치한 '에스토니아'라는 국가가 있다. 확실한가? 분명하가? 있다. 그곳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곳에는 130만의 사람이 살고 있다. 다만 나는 '에스토니아'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그 나라에 방문한 적도 없다. '그곳에 그곳이 있다'는 믿음은 거의 믿음을 통해 나온다. '에스토니아'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자료와 사람들의 증언을 믿는다. 그곳을 직접 가보지도 못했고 눈 앞에 존재하지 않지만 믿는다. 믿는 사람에게는 있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없다. 사람의 일생 중 시각적 정보로 받아들이고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양은 얼마나 되나? 대부분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삼성'이라는 회사는 존재하는가. 법률상 정의에 따라 법인은 '무존재'를 '존재'로 만든다. '삼성'은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삼성'이라는 '법인기업'을 '있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있을 뿐이다. 누군가 묻는다. '신은 있나?' 모른다. 그것을 믿는 이에게는 있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없다. '더 높은 지성체'를 믿기에 함께 있거나 없다고 믿을 뿐이다. '대부분'의 '유사과학'들도 이런 식이면 설득력을 갖는다. 고로 주의해야한다. 그러나 '있음'과 '없음'을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수도 있다. 누군가는 지구를 평평고 한다. 누군가는 달이 '인공구조물'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외계인'이 피라미드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 음모론들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접근은 때로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이다.

 12월 24일 가지고 싶은 선물을 간절히 바란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 선물은 트리 밑에 있지 않을 것이다. 울거나 말거나, 떼쓰거나 말거나 '산타'는 선물을 놓고 가지 않는다. 12월 24일 밤에 일어날 특별한 사건은 '없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와 같은 365일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로써 인생의 재미 하나를 줄인다. 아무도 보지 않은 밤,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시간, 혼자만의 나쁜 짓을 저지른다. 절대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신은 이 못된 짓에 징벌하지 않을 것이다. 삶의 제어장치를 뜯어냈다. 간절히 기도하고 바래도 언젠가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사건은 인과 관계가 분명해야 일어난다. 기도와는 무관하다. 삶의 '기대치'를 대폭 낮춘다. 누구도 제어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예측하지 않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삶은 점차 '의미'를 잃는다. '존재한다'와 '존재하지 않는다'를 구별하는 것은 별거 아니다. 그렇게 믿으면 그렇고, 그렇게 믿지 않으면 그렇지 않다. '있음'과 '없음'을 분명하게 나누면 삶은 재미가 없어진다. 직접 보지 않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할수록 삶은 빛을 잃어간다. 살고 있는 세상이 좁아진다. 우리 일생동안 어차피  모든 것에 '있음'과 '없음'을 분간하지 못한다. 그럴 필요도 없다. 기왕이면 삶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있다' 쪽으로 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상식적으로 가능하냐', '이성적으로 말이 되냐'를 따질 것이 아니다. 삶의 가치가 '상식적'이고 '이성적'일수록 빛을 잃어가는 것이라면, 가끔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믿음도 받아들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귀신, 도깨비, 외계인, 산타를 가르친다. 나쁜 짓을 하면 '경찰 아저씨'가 잡아간다고 '협박'도 한다. 이것을 믿을 수록, 아이는 '적당한 제어장치'를 갖는다. 자기 삶에 적당한 기대를 하며 올바른 방향을 택할 것이다. 이성적인 접근을 하면 우리는 잃어버리는 것들이 많다. '법'은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합의 규칙이다. 법만큼이나 질서를 만들어주는 것은 '믿음'이다. '신호위반'과 '과속 딱지' 십 수 만원만 결제하면 도로 위를 무법지대처럼 달려도 된다. 자유이용권처럼 '돈' 몇푼이면 세상은 놀이공원이 된다. 결국 '범법'도 구매 가능한 세상이다. 법의 통제력을 강력하게 신뢰하긴 힘들다. 결국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근본에는 '법'보다 '종교', '도덕', '믿음'과 같은 무형의 것들이다.

 '없는 것도 있다'라고 여겨야 한다. 그래야 실감나게 소설과 드라마, 영화를 즐길 수 있고 만화에도 몰입할 수 있다. 그만큼이나 인생도 즐길 수 있다. 만화 '원피스'에 등장하는 '고무고무열매'가 있다. 이 열매는 먹으면 손과 팔이 고무처럼 길어진다. 정형외과학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이유를 따져가며 만화를 본다면 엔터인이먼트 하나를 스스로 놓는 것이다. '9와 3/4 승강장을 찾기 위해 벽을 뚫는다는 설정이 말이나 되냐?'를 따지고 든다면 다시 또 그만큼의 삶의 재밋거리를 놓친다. 판타지는 '그러던지 말던지, 있다고 가정하고 보자'라는 유연성을 준다. 기공을 모아 장풍을 쏘고 현대에서 과거로 넘어 갈수도 있다고 믿어보자.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가짜 '흉내'를 진짜라고 속아보자. 믿어보자. '있다', '없다'는 가치판단을 내리지 말자. '있을 수도 있지'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평생을 살다 눈 감는 마지막 날, 실체를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그것이 없다'는 단단한 믿음을 유연하게 바꾸자. 마녀가 없다고 생각한 이가 소재가 되는 '판타지 소설'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은 '있다'와 '없다'를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없다고 믿던 것을 보게 된다. 분명 터무니 없는 이야기도 다른 세계에서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나비는 나비였으나, 다시 이 세계에서는 '장자'였다. 본인이 '장자'라고 틀림없이 생각하겠지만, 다음 세계에선 틀림없이 '나비'일 것이다. 무엇이 진짜인가.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서 우리는 '몰라도 되는 약'을 선택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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