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뉴스, 쇼핑, 게임, 유튜브, SNS. 풍요가 넘치는 시대에 사람들은 더 많은 결핍을 느낀다. 어째서 사람들은 더 풍족졌음에도 고통받는 것일까. 쾌락과 고통은 뇌의 같은 곳에서 처리한다. 우리가 크게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행복'에 대한 인식인데,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과 쾌락을 같은 선상에 둔다. 사람의 뇌는 감정에 따라 다른 파장을 내보낸다. 이를 '뇌파'라고 한다. 뇌파 중 '감마파'는 극도의 흥분상태다. 이 상태의 인간이 스트레스와 불안을 느낀다. '쾌락'과 '고통'은 이 '감마파' 파장을 갖는다. 반면 안정적인 파장은 '알파파'다. 뇌파의 종류로 보자면 '알파파' 상태는 비교적 잔잔한 진동을 갖는다. 이는 '정서적 안정 상태'이며 굳이 따지고 보자면 '행복'에 가깝다. 현대인들이 '즉각적인 보상'을 우선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가장 기피하는 심리 상태는 기본적으로 '불안'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200만년 이상 연약한 동물로 살았다. 180만 년이 지난 뒤에야 스스로 사냥이 가능했고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포식자' 역할을 한 것은 고작해봐야 10만 년 전이다. 그 전까지 호모 사피엔스는 포식자가 먹다 버린 썩은 고기를 먹는 존재였고 직립보행하면서 골반이 작아진 탓에 '여성'은 출산의 고통을 가져야 했다. 인간은 좁아진 골반과 비정상적인 신체 구조 때문에 출산기간이 짧아졌다. 결국 '어린 인간'은 미숙한 상태로 태어난다. 다수의 동물에 비하면 아기 인간은 무능력 그 자체다. 포식자에게 잘 들키도록 시끄럽게 울고 상당 기간 동안 무능한 상태로 지내기 때문에 여성이 '육아'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문화적 구조를 만들어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무능'하고 '연약'했다. '호모 사피엔스'를 생존케 한 감정이 있다. '불안'이다. 불안은 공동체를 이루고 결속을 강하게 만들었다. 포식자로부터 경계하게 했고 다양한 지역과 계절에도 생존할 수 있게 미래를 대비하게 했다. 호기심을 길러 지혜를 가졌다. 이런 인간의 성장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감정이 '불안'이다. 과거에는 불안을 없애기 위해 더 '경계'를 하거나 더 믿음직한 '공동체'를 구성했다. 인간은 '불안'의 감정을 해소할 때,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한다. 즉 '도파민' 분비는 '불안해소'를 의미한다. 불안이 해소되면 인간은 '생존'에 대한 보장을 받는다. 다른 동물들과 다르지 않게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넘기기 위해 '생존'을 최우선으로 둔다.
'불안'을 해소시키거나, '생존력'에 대한 위협으로 '도파민' 강제 유발 시킬 수 있다. 이렇게 분비된 도파민은 다시 '불안'을 해소하고 '생존'에 대한 보장을 한다. 이 순환 고리에 시작되면 흔히 현대인들이 말하는 '중독'이 시작된 셈이다. 찬물에 샤워를 하면 인간은 적당한 고통을 받는다. 이 중 당연하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별것 아니지만 간헐적 단식이나 기타 즉각적인 보상도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애나 렘키'의 저서 '도파민네이션'의 1부 1장의 제목은 '자위 기계를 만드는 남자'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를 보면 가장 하위에 '생리적 욕구'가 있다. 식욕, 성욕, 수면욕이 그렇다. '성욕'은 그만큼 가장 본능적이고 기본적인 욕구다. '애나 렘키'가 자신의 저서, 첫 장에 이처럼 '자극적인 주제'를 배치한 이유는 그만큼 '중독'이 가장 기본욕구에 자극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불안의 상태로 머물러 있게 한다면 이 또한 인간을 지금껏 번영치 못하게 했을 것이다. 인간의 뇌에는 자기 조정 메커니즘이 있다. 이는 일종의 '저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양팔 저울에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다면 이 자기 조정 메커니즘은 수평을 이룬다. 다만 뇌가 도파민을 분비하면 저울은 쾌락으로 기울어진다. 저울이 쾌락으로 기울어지면 더 많은 쾌락을 느낀다. 한번 기울어진 저울은 다시 반대쪽으로 기울여지기 쉽지 않다. 저울을 다시 수평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그 쾌락 수준의 '고통'을 올려 두어야 한다.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고통이 함께 커진다. 고통과 쾌락이 함께 그 덩치를 키워가다가 어떤 임계점에 다다르면 인간은 마약이나 술, 포르노 등 아주 강력한 자극을 주어도 더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중독을 치료하기 위한 가장 대표적인 방식인 '약물치료'이 정답이 될 수 없는 이유다. 흔히 담배를 끊으면 '살'이 찐다는 속설이 있다. 쉽게 말해서 중독의 대상이 '담배'에서 '음식'으로 바뀔 뿐, '중독'의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사회는 극단적으로 능력주의가 됐고 능력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경쟁'을 택했다. 이 '능력주의'와 '경쟁주의'는 '생존력'을 자극한다. 목적을 달성하거나 경쟁자를 쓰러뜨리는 방식으로 '보상'을 받았다. 현대인들은 이처럼 '보상'에 민감한 상태로 길러졌다. 이렇게 '불안'이라는 감정을 무기로 성장시켜 온 '경제' 덕분에 사회는 더 많은 '중독'을 파생시킬 수 있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 소셜미디어, 게임, 쇼핑을 통해 자극을 받고 '도파민'을 보상 받았다. 피로사회에서 도파민으로 근근히 버텨 내면서 중독의 다른 대상을 찾아 헤맨다. 극단으로 치닫는 우울증 및 자살자수 증가, 출산률 감소, 게임과 도박 중독, 주식과 비트코인 단기 거래 과몰입은 그렇다. 탐닉의 시대, 균형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약물치료'가 아닌 '자세'에 있다. 우선 고통을 마주봐야 하고 둘째로 있는 그대로 말해야하며, 세번째로는 수치심을 환영해야 한다. 왜 그것을 멈추지 못하는지, 그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해야 해결책이 나온다. 현상을 치료하는 '약물'은 단순히 또다른 중독을 만들어 낼 뿐이다. 어떤 것에 중독을 없애기 위해선, 중독 대상을 쓰레기통에 버려야하고, 다시 그 쓰레기통 마저 버려야 한다. 그 결핍의 고통을 이겨내야 우리는 최초에 말했던 '알파파' 뇌파를 가질 수 있다. 행복과 쾌락이 동일시 되는 사회에 우리가 진짜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언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