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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에게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어떤 면에서 다행일지도 몰라.
그날 말이야.
그날에 대해 알게 된다면
너도 큰 충격에 빠질지 몰라.
기억하지 못하는 너에게
아주 작은 기록을 남겨주고자 해.
너에게 사고가 난 날,
그 녀석의 표정은 끔찍했지.
너를 바라보는 그 녀석의 표정.
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사고가 났지만, 내가 그 녀석보다 먼저 도착한 건
다행이라는 생각이들어...
꼭 너에게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차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어.
그 곳에 너를 끄집어 내려다가
내 팔에도 상처가 심하게 생겼지만...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
사고를 낸 녀석이 너를 향해 달려갈 때
온 몸에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지.
오늘은
이만 쓸께. 몸조리 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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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씨에게
경산 씨와의 좋은 추억을 모두 잊어서 죄송해요.
함께 보내주신 사진을 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 여자였는지 알게 됐어요.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난 건 참 행운이에요.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이제 2주만 더 있으면 퇴원해도 좋다고 하셨어요.
경산 씨와 만나게 될 날이 기다려지네요.
아무리 사고라고 하지만
경산 씨 얼굴마져 기억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다만 사진을 보건데 참 잘 어울리는 한 쌍 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해요.
지난 번, 편지에서 말씀하신 '그 녀석'은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혹시 저도 알고 있는 '그 분'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경산 씨'의 얼굴을 잊었지만,
'그 분'의 얼굴은 또렷하게 기억나요.
그 분 때문에 사고가 났을 거에요.
자는 시간에도 먹는 시간에도
항상 그 분의 눈이 저를 향하고 있었어요.
제가 운전할 때도 항상 제 뒤를 쫒아오곤 했으니까요.
아무래도 '그분'보다 '경산 씨'가 먼저 도착했다는게 천만 다행이에요.
의사 선생님이 면담하자고 하셔서 글은 짧게 마쳐요.
몸조리 잘하시고 2주 뒤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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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에게
그 녀석 얼굴을 또롯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다행이야.
편지를 보낸지 벌써 1주일이나 지났네..
그 동안 나도 많이 치료가 됐어.
둘다 병실에 누워 있다보니
서로가 병문안을 못가고 있네.
혹시 요즘도 잘 때
토끼 인형 옆에 두고 함께 자?
병원에 토끼 인형이 함께 갔는지 궁금하네.
혹시 토끼 인형이 없다면
내가 다시 보내줄께.
언제든 알려줘.
답장 기다릴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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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씨에게
이제 이틀 뒤면 만나는 날이네요.
의사 선생님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쓰지 말라고 하시는데
경산 씨 만나기 전에 이것저것 떠올려 보려고
스마트폰의 사진을 보고 있었어요.
차사고 때 스마트폰이 심하게 고장나서
동생이 이제서야 복구를 해줬어요.
제 사진에 경산 씨랑 찍은 사진이 없는데
아마 '그분'이 그랬을까요?
전화를 드렸어도 됐는데,
나름 편지도 낭만적이라 마지막 편지를 써요.
병원 주소랑 퇴원 시간을 함께 보내들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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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의 전화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해주야. 난데.. 경산이 그 자식이 지금 그 쪽으로 가고 있거든? 최대한 빨리 도망쳐"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세요?"
해주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상대에
알 수 없는 친숙함을 느낀다.
"우리 차사고... 그 녀석이 한거잖어.."
해주는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이
환하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본인을 자신의 남자친구라고 단단히 착각하는 '경산'
그가 갖고 있는 망상장애.
모든 것이 기억에 났다.
해주는 급하게 옷을 챙겨서 병원문을 나서려고 한다.
문을 활짝 열고 나가려는 그 순간.
경산이 한 쪽 손에 토끼인형을 들고 서 있다.
"왜 어디가려고?"
경산은 뒤에 숨기던 다른 손을 꺼낸다
시퍼런 칼날이 드러났다.
칼날로 토끼인형을 몇번 쓰다듬은 경산이 말한다.
"기억이 났구나?"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어떤 면에서 다행일지도 몰라."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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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에게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어떤 면에서 다행일지도 몰라.
그날 말이야.
그날에 대해 알게 된다면
너도 큰 충격에 빠질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