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책] 모르는 것을 모른다는 것 조차 모른다

모든 것은 무지다

by 오인환

긴장과 불안. 공포, 두려움, 슬픔이나 분노, 짜증과 갈등, 불쾌 등 각기 모양은 다르지만 원치 않는 감정들이 있다. 이 감정들은 속에서 발생하지만 겉으로 뿜어져 나온다. 내면의 감정이 외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상대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가 상대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 해결 능력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 쪽으로 넘어간다. 넘어가는 순간, 내가 역할은 '당하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감정들의 원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대부분 '무지(無知)'에서 온다. 부정적인 감정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감정도 마찬가지다. 사랑, 호기심, 기대, 기쁨과 환상 등 우리를 유쾌하게 만드는 감정도 그 뿌리에는 '무지(無知)'가 있다. '무지(無知)'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것일까. '무지(無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안에 대한 무지(無知)'와 '밖에 대한 무지(無知)'다. 안에 대한 무지는 '자신'의 감정, 상황, 자아에 대한 무지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자신이지만, 다시보면 잘 모른다. 밖에 대한 무지는 대게 미래, 과거, 환경, 상대방, 현상을 말한다. 잘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알 수 있는 여지가 있기도 하다. 이 두 가지에 대한 무지는 앞서 말한 부정적인 감정과 긍정적인 감정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있잖아, 사람은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봐. 용감해 질수 있어."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방향으로 바꾸고자 한다. 어두운 곳에는 불을 밝히고 싶어하고, 어지러진 것은 정리하고자 한다. 이름이 없는 것에는 이름을 붙여주고자 하고 모호한 것은 분류하고자 한다. 그것이 현대과학인 '분류학'을 발전 시켰다. 과학(science)과 공부 혹은 연구(study)의 첫 음절이 가위(scissors)와 닮은 것은 '앎' 자체가 나누고 분류하는 것과 어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바꾸는 과정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것은 '상상'이다. 상상은 '미지'의 공간을 '지'의 영역으로 바꾸고자 하는 시도다. 그것은 '호기심'이다. 호기심은 인간의 문명을 발전 시키기도 했다. 다만, 그것은 '고통'도 만든다. 모르는 쪽에서 아는 쪽으로 바꾸기 위해, 인간의 두뇌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망상'을 시뮬레이션한다. 쉬지 않고 돌아간다. 그것은 '가상'이지만, '현실'과 같은 고통을 만들어낸다. 뇌는 인간의 가짜 웃음이 진짜 웃음을 구별해내지 못한다. 인간의 뇌는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에 쉽게 속는다. 슬픈 노래를 부르는 가수나 비극을 연기하는 연기자들이 자신의 삶을 더 비극적으로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로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시뮬레이션 횟수'를 획기적으로 줄여야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보자. '미움'이라는 갈등은 '상대가 나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미움은 상대에 대한 '무지(無知)'로 발생한다. 아무 이유없이 그냥 일어나는 것은 없다. 모든 일에는 있어야 할만한 이유가 있다. 아무 이유없이 오른쪽에 있던 것이 왼쪽으로 가거나, 해가 사라지거나, 달이 세모가 되는 경우는 없다. 모든 일에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원인과 이유가 있다. 날씨가 그렇다. 이유를 모르던 시대에 그것은 그냥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하늘이라는 것은 '미지' 투성이었다. 고대인들은 '하늘'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기도하고, 신성함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무한한 공간에 대한 공포와 경이로움이 동시에 인간의 욕구를 자극했다. 다만 인간이 하늘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것 들은 그럴 수 밖에 없는 현상들의 집합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대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와 원인이 있다. 그저 나와 다르다고 치부하고 이해를 거부한다면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기독교에는 '삼위일체론'이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로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흔들리는 나무조차, 바람이라는 흔적이 원인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덩어리처럼 움직이는 것은 '원인'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른다는 것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모르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있지만,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 있다. 깊은 오해와 갈등은 대게 두 번째에서 나온다. 모르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것은 이해의 폭을 넘어가기 때문이다. 자신도 자신을 잘 모른다. 자신이 자신을 잘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 있다. 고로 상대도 자신을 잘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장난 같은 이 말은 곱씹어 보면 곱씹어 볼수록 이해의 폭은 넒어진다. 덮어두고 미워하거나, 덮어두고 포기하거나, 덮어두고 슬퍼하는 것은 '무지(無知)의 소치(所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공포', '미움', '증오', '슬픔'에 자신을 무방비하게 방치하는 것이다. 사람의 머릿속에는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 무한대로 휘몰아친다. 폭풍처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먼지와 불길이 어지럽게 쏘다닌다. 그것은 불쾌와 유쾌의 감정과 생각들이다. 그것들은 사실 모를 수록 휘몰아친다. 인간이 '집'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 공간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안다는 것은 공포와 불안,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든다. 내가 있는 마음의 공간도 마찬가지다. 가장 모를 때, 그 공간은 불안과 두려움, 공포의 공간이 되지만, 이해하고 잘 알게되면 집처럼 편안한 공간이다. 상대도 마찬가지다. 상대도 상대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 그것을 내가 모르면 불편함을 느끼지만, 그것을 안다는 것만으로 상당수 편안해진다.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대부분은 '집'처럼 편안하고 아늑해진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깨달음(앎)'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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