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의 메일을 받은 적 있다. 내가 정의한 삶의 의미에 대한 반박이었다.
'삶은 태어나버림과 죽어버림 사이의 공백을 채워넣는 일일 뿐이다. 거기에는 목적이나 의무가 없다.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은 의미있는 일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내가 정의한 삶의 의미였다. 정의한 의미가 못마땅한 그는 말했다.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허무주의'를 닮았다며 나의 자세가 위험하다고 비꼬았다. 삶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는 몇 권의 책과 글을 통해 적어 둔 적이 있다. 그것은 공백을 채워 넣는 일일 뿐이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실제로 정신병 발병 요인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스탠포드 대학의 얼빈 D. 얄롬은 '실존적 심리치료(Existential Psychotheraphy)에서 정신과 외래병동에서 꾸준히 치료를 받던 환자의 30%가 삶의 의미와 관련된 문제로 병을 얻었다고 보고했다. 알토 동부 지방에서도 그 차이는 1% 밖에 나지 않았다. 삶의 무의미하다는 자세가 실제로 '허무주의'를 닮았고 그것은 정신건강에 이롭지 못하다. 다만 내가 말했던 삶의 의미는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이 나에게 던저 준 숨겨 놓은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다. 삶에는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며 들었던 예시가 있다. 한 실험에서 실험자를 빈 방에 들어가도록 했다. 방에는 의자 하나와 비워져 있는 통 하나가 있었다. 실험자들에게는 들어가기 전, 조그마한 테니스공을 쥐어 줬는데, 이들 모두가 일정 시간이 흐르자, 쥐고 있는 테니스공을 통 안에 집어 넣었다. 이 시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렇다. 실제로 빈 공간과 빈 시간이 주어지면, 인간은 '무의미'한 공간과 시간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한 행동을 한다. 때로 그것에 '목적'을 만들기도 한다. 반드시 10번에 10번을 넣겠다는 다짐을 하거나, 벽을 튕구고 집어 넣겠다는 설정도 집어 넣는다. 삶의 의미라는 것은 '주체적인 것'이다. 태초부터 필수불가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실제로 '삶의 의미'에 대해 고뇌한다.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사회과학자들이 48개 대학의 학생 7,948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던 적이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학생 16%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답했다. 다만 78%의 학생은 '자기 삶의 목표와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비슷한 조사가 있다. 이 조사에서는 전체 인구의 29%가 자신의 삶에서 의미가 사라졌다고 답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도 자살률이 높은 국가로, 한때 10만명 당 26명이 자살하는 국가였다. (참고로 대한민국은 2015년 기준 25.6명이다.) 삶의 의미가 사라진 사람들은 '우울증'과 더불어 다양한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한다. 프랑스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프랑스인 89%는 인간에게는 살아야 할 의미를 주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실험과 조사의 의는가 조금씩 다르지만 의미를 상실한 삶은 쉽게 고통에 빠진다. 의미란 모두 각자가 부여하기 나름이다.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은 비관적인 현실에서도 자연풍경을 감상하거나, 유치한 농담을 주고 받기도 했다. 이들의 상황에서 가장 아이러니 한 것은 '자살'에 대한 그들의 관점이었다. 그들은 처음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에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는 점차 가스실이나 죽음 조차 두렵지 않게 되는 상황을 맞았다. 이들은 되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살을 보류하곤 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 중 하나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말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의미란 인간에게 고통을 견디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다. 의미를 상실해 버린 고통은 도스토프옙스키의 말에 따르면 가장 두려운 일이다.
'무'에서 '유'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명확하고 확실하게 그 순간의 고통을 멈추게 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말했다. 어떤 감정이나 상태던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에게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 정신병을 앓고 있던, 신체적인 문제를 갖고 있던, 어떤 불합리한 상황에 빠져 있던간에, 인간에게는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식수로 배급 받은 한컵의 물을 덜어, 세수와 면도를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수동적인 상황의 주체성을 가지고 올 수 있다. 니체는 말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모든 것은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 의미가 부여된다. 자신을 고통으로 빠뜨렸던 어떤 것에도 '성장통'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인간은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언제나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낙관주의를 뜻하는 'Optimism'은 '최선'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최선'이라는 말은 '여럿 가운데 가장 앞선 선택'을 말한다. 즉, 이미 주어진 선택지 중, 가장 앞선 선택을 하는 것을 낙관주의라고 한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뿌느, 세상은 언제나 좋지 못한 상태였고, 불운과 비관 투성이었다. 앞으로 모든 것은 더 나빠질 것이다. 스스로도 더 늙어가고 노쇠해질 것이다. 다만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진 않는다면 상황은 더 빠르게 나빠지고 비극적으로 흘러간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극적으로 흘러가는 세상의 디폴트값을 인정하고 개중 최선의 선택을 함으로써 상황의 주체성을 자신의 방향으로 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