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 있던 것을 잃는다. '상실'이라 한다. 상실은 '소유'을 전제로 한다. 소유하지 않으면 '상실'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소유한다면 끝에는 언제나 '상실'이 있다.
사람은 나면 죽는다. 극단적으로, '출생'의 방향은 '죽음'이다. 태어나는 순간,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때와 장소, 이유와 방법만 다를 뿐 목적지는 같다.
태어나면 '하나'가 생겨난다. 죽으면 '하나'가 없어진다. 태어남이 '1'이고 죽음이 '-1'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만남이 '1'이고 이별이 '-1'이 되는 것 처럼 말이다. '태어남'은 반드시 '죽음'을 함께 한다. '만남'은 반드시 '이별'을 함께 한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다만, 모든 인간은 홀로 태어나, 홀로 죽었으며, 만나고 반드시 이별했다. 그것은 붙어다니는 두 개의 다른 점이 아니다. 하나의 직선이다. 기하학에서 물체를 늘리거나 구부려 모양을 바꾸는 것을 '위상동형(位相同型)'라고 한다. 쉽게 말해 반지를 양쪽으로 길게 늘려 빨대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빨대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다. 입으로 빨아 들이는 구멍과 빨려지는 구멍이 있다. 분명 위와 아래에 구멍이 있지만 실제로 빨대의 구멍은 하나다. 빨대의 구멍이 '반지'와 위상동형이기 때문이다. 만남과 이별, 태어남과 죽음은 두 개의 다른 모양 같지만 공(空)이라는 비어있음의 위상동형(位相同型)이다. 모든 극단은 하나이지만 둘이고 반대이지만 붙어 있다. 이것이 '음양론'이다.
애초 모든 것은 공(空)하고 무(無)하다. 부처가 공(空)하다 하고, 노자가 무(無)하다한다. 그러함을 깨닫는다. 김광석의 노래 '서른즈음에'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대목이 있다. 삶이 끊임없는 이별의 연속이라는 말이다. 이별에 촛점을 맞추니 삶이 온통 이별하는 것다. 다만 빨대의 반댓쪽 역시 하나의 구멍이라는 것을 보자면 삶은 끊임없는 만남의 연속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이처럼 공(空)과 무(無)의 위상동형(位相同型)이다. 전체를 보면 하나의 덩어리다. 그것을 길게 뽑으니 한 쪽만 부각되어 보인다. 태어날 때, 실 한오라기 갖고 나지 않는다. 죽을 때도 그렇다. '무소유'로 태어나고 '무소유'로 죽는다. 고로 삶에서 얻게 되는 것 중 속옷 한 장까지 모두 빌려쓰고 갚아 내는 것이다. 세상에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믿던 것들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 '빌린 것들' 투성이다.
그것을 '자연'에서 빌렸든, '신'에게서 빌렸든, '내 것'이 없다. 잘 사용하고 돌려주려면 빌린 기간, 잘 활용하고 깨끗이 쓰다 돌려줘야 한다. 내 것이 아닌 것에, 내 것이라는 소유욕을 강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빨대 반댓쪽 구멍이 여지없이 커진다. 상실감이 그만큼 커진다.
참 오만하고 무지하게 인간은 빠진 물에서 구해주면 '보따리'를 내놓으라 한다. 빈손으로 와서 '인연', '삶', '가족', '사랑' 모든 것을 빌려쓰면서 '감사하다'는 말 한 번 없다. 이러니 세상이 '다신 빌려주나 봐라' 괘씸히 생각해도 싸다. 받을 때의 감사함을 모르니, '상실감'만 커져 간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여기서 색(色)은 존재(Thing)을 말한다. 공(空)은 비어 있음을 말한다. 즉 존재하는 것은 비어있는 것이고, 비어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쾌락이건, 사랑이건, 삶이건, 기억이건 모든 것은 현상하고 존재하지만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억울해 할 것도 없다. 빌려 썼으면 불평불만하고 후회할 것이 아니라, 충분히 그것에 감사하고 만족해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로 '소유'와 '상실'을 이야기했다. 소설이 가슴 먹먹해지는 이유는 후반부에 이어지는 '상실'들 때문이다. 따지고 들자면 소설의 전반부는 온통 '만남'과 '소유'가 이어진다. 누군가를 만나고, 인연이 된다. 그것은 인과관계다. 시작을 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많은 상실은 많은 만남과 인연을 뜻한다. 상실감이 많다는 것은 인생의 색(色)이 풍부하다는 것을 말한다.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하면 뿌린대로 거둔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이를 나쁜 쪽으로만 생각한다. 꼭 나쁜 짓을 하고 벌을 받을 때 사용한다. 다만 인과응보(因果應報)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는 원인이 있으면 그에 합당한 결과가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만남을 하면 이별을 하고, 태어나면 죽음을 맞이한다. 빨대의 윗구멍과 아랫 구멍처럼 이것은 이름을 두 개로 부르지만, 원인과 결과는 하나의 구멍일 뿐이다. 책을 읽고 먹먹하다. 인간의 감정이라 그렇다. 원리를 모른다면 자신만의 상실감에 사로잡힐테지만, 원인을 알고나면 담담하게 받아 드릴 수 있게 된다.
감사하게도 물건을 빌려 쓰게 된다면 비록 주인이 일찍 돌려 달라고 하더라도, 빌린 물건이 아무리 탐난다고 하더라도, 감사하게 썼다고 말하며 돌려 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