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와 처음 만났을 때, 대학에 들어갔을 때, 직장에 입사했을 때, 결혼했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목표를 이루었을 때처럼 누구나 사건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는 경험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 무식한 투자
아직 찬기운이 여전한 4월 16일 오전 9시 나는 상가분양사무실 문 앞에서 덜 덜 떨며 서있었다. 3개월 전 분양상가를 3억에 계약하고 잔금날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실 상가를 계약하는 그날부터 후회막급했다. 상가에 대한 상식도 경험도 없이 남의 말만 듣고 덜컥 계약하다니 미친 짓이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빌라, 아파트를 거래하면서 부동산에 대한 막연한 허세가 쌓인 게 분명했다. 신축 분양 상가를 계약하고 나서 상가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으니 100% 패 하는 게임이었다. 지금이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신도시에 신축상가, 그것도 303호 공실 물건이었다. 분양담당자 말로는 치과 자리라고 소개했지만, 계약한 날 이후 3개월이 지나도록 임차하겠다는 문의가 한 건도 없었다. 계약당시 나의 수익구조 설계는 3 억매수, 2억 대출, 월 임대료 100만 원이었다. 4% 이자 60만 원 정도 제하면 매월 40만 원을 벌 수 있다. 상가 수익률 계산 식으로 계산하면 4.5% 에 나쁘지 않은 투자라 생각했다.
상가수익률
:: 임대투자의 필수조건은 임차인
수익률 계산으로 뜬 구름만 잡아봤지, 상가임대차의 현실은 전혀 모른 채 계약을 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수익률도 좋고, 항아리 상권도 좋고, 신축이고, 엘리베이터가 어떻고 하는 모든 아름다운 상황들은 임대가 정상적인 가격으로 나갔다는 전재가 필요하다. 임차인을 구할 수 없다면, 수익률 공식은 허상이 된다.
:: 무식한 용기
그날 나는 상가계약을 파기하기 위해 분양사무실을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담당자는 내가 왔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 들었는지 당일 출근하지 않았다.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시공사 대표를 찾아갔다. 소규모 상가였기 때문에 시공사와 분양사가 같은 회사였다. 마침 회장님이라는 분을 복도에서 만났다. 다짜고짜 이 계약을 물러달라 했다. 근거는 임대차 계약이 완성되는 때에 분양 상가 잔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을 계약서에 특약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믿기지는 않지만 통 큰 회장님은 그 자리에서 계약금 전액(1억)을 돌려주고, 계약을 파기했다. 양자 간 그 어떠한 계약파기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사실 그때 나는 계약금을 날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덜덜 떨며 문 앞의 덩치들을 제끼고 회장님을 만난 이유는 계약금을 조금이라도 돌려달라 애원하기 위함이었다. 협의가 잘되어 망정이지 영락없이 1억을 날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6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하다.
:: 현금은 재앙이다.
그때 이후로 상가 부동산 물건은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눈길조차 두지 않게 되었다. 무턱대고 상가 계약을 했던 이유가 분양담당자의 뛰어난 영업력 때문 만은 아니었다. 부동산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여러 차례 빌라거래를 하면서 5억 정도의 현금이 생겼었다. 투자 실력이 없는 사람에게 통장에 돈이 있다는 것은 재앙이다.
5억 원이라는 돈으로 당장 부자가 되고 싶었고, 5억 원으로 팔자를 고치려 고수익을 원했다. 상가투자 실패는 탐욕에 눈이 멀어 폭주하는 나를 멈추기에 충분했다.
투자를 멈추고 , 투자를 가르쳐줄 선생님을 찾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오피스텔임대투자 전문가와 지식산업단지 전문가들를 찾아다니며 투자 법을 배우고자 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공하신 분들처럼 보였지만, 내가 배우고 따라 할 수는 없었다. 특이한 상황과, 단기적인 투자회전율을 직장인인 내가 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차라리 내가 그동안 투자해 온 저가 빌라팔이가 좀 더 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다.
광명이 재개발 사업에 탄력을 받으면서 조합원 입주권이 활발히 거래되던 시기에 아내와 나는 1R 구역에서 중개업을 운영했었다. 당시 조합설립 이후 구역 내의 다물권자로부터 입주권을 매수한 물건에 대한 물딱지 논란이 뜨거웠다. 애매한 도정법 이슈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여러 전문가들을 찾았지만 명확한 지식과 경험을 공유해주지는 못했다. 전문가라는 마케팅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집요한 검색 끝에 진정한 전문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분은 관련 박사학위와 자격은 물론 실전 경험으로도 다른 전문가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 투자자의 변곡점
그분을 만난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으며, 자산의 규모도 그분과 만난 이후 큰 폭으로 상승했다. 가장 큰 변화는 투자 스타일이 생겼다. 시장에 기반한 입지위주의 투자를 선호하게 됐다. 2019년 이전까지는 투자라고 말할 수 없다. 시장을 몰랐기 때문에 구체적인 물건 자체의 가격에만 집중했다. 가격이 싼 물건을 사고, 오르면 팔았다. 나쁘지 않은 방법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언제 사고 언제 팔아야 할지 몰랐다. 내가 사고 난 후 더 떨어지기도 했고, 내가 팔면 더 미친 듯이 올라갈 때도 있었다. 순전히 운에 맞기다 보니, 점점 더 저가 매수에 목을 매었다. 저가매수를 선호하다 보니 물건은 점점 더 형편없는 것을 취급하게 되고, 처분하기 위한 일들은 더 늘었다.
교수님을 통해 시장과 정부정책, 금융을 아주 조금 이해하게 되면서, 저가 매수의 무한 지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역사적 증거를 통해 시장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아직도 투자는 어렵다.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허무맹랑한 전문가의 말에 휘둘리지 않으며, 엉뚱한 시간에 엉뚱한 물건을 골라낼 수 있게 되었다. 나만의 투자스타일을 갖게 된 것이 진정한 스승을 만나 얻게 된 최고의 선물이었다.
:: 합리적인 투자스타일 Top-down
투자를 시작하려거든 내가 한 방법의 정 반대로 하면 된다. 처음부터 개별물건에 몰입할 게 아니라 시장을 먼저 봐야 한다. 내 통장의 현금 보유량을 볼 게 아니라 전체적인 유동성과 인플레이션의 흐름을 봐야 한다. 무조건 싼 집을 찾을 게 아니라, 입지를 보고 서열이 정해지는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한다. 전체적인 시각을 가진 후에 디테일한 개별 물건을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내가 알게 된 부동산학은 Top-down 방식이 적정했다.
불행하게도 부동산을 우리 동네 아파트 알아보기부터 시작하는 Bottom-up 방식의 부동산공부가 우리에게 훨씬 더 쉽게 다가온다. bottom-up방식이 비용도 안 들고, 나 혼자 할 수 있는 공부라서 실패해도 손해 나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바텀업 방식으로 부동산투자를 시작했다. 엄청난 시간낭비와 불필요한 비용을 몇 배나 쓰고 나서 올바른 전문가와, 전체적인 시야를 먼저 갖는 것이 가장 저렴하고 빠른 방법임을 알게 된 멍청이가 나였다. 수영장인 줄 알고 뛰어들었다가, 깊은 바닷물 인 걸 알고 죽을 뻔하기도 했다.
투자유형 중에 부동산만큼 안정적이고 고수익도 없지만, 시장을 모르고 뛰어들면 부동산만큼 위험한 투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