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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금택 Jul 22. 2024

승진 누락자

나는 운 좋게도 학창 시절 공부를 못했다.

나는 운 좋게도 학창 시절 공부를 못했다. 부모님도 가난하셔서 대학 졸업 당일부터 회사일을 시작했다. 사회 출발선에서 칼이나 방패는커녕 그 흔한 자격증 하나도 없었다.

입사동기들은 여러모로 최고였다. 좋은 학교, 좋은 성적표, 실력을 탄탄히 입증하는 자격증과 해외연수경험 등 회사업무를 위한 최고의 무기들로 중무장한 채 업무를 시작했다.

미리부터 선배들에게 눈도장이 찍힌 ‘애자’ 들은 힘 있는 부서로 배정됐다. 해외출장 업무가 잦은 직원은 늘 고과가 높았다. 일 잘하는 동기들은 실력도 일취월장했고, 그만큼 끌어주는 선배도 많았다. 입사 후 4년쯤 지났을 때, 요직을 맞은 동기들은 대리 승진을 위해 뼈를 갈아 넣고 있었다. 회사 입장에서도 차세대를 키우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중에도 나는 늘 미운 오리새끼처럼 열외가 되었다. 첫 승진발표에서 내 이름이 누락되었을 때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동료가 내 위 상사가 되는 것이다. 오늘부터 존대말을 써야하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음기회에 올라가면 된다는 위로는 술잔만 더 늘게 했다. 능력도, 인맥도, 돈도 없었던 나는 동기들과 도저히 경쟁상대가 되지 못했다. 패배가 뻔한 회사에서 다른 회사로 이직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저기 인터뷰해 보니 조건은 거기서 거기였다. 새로운 회사에 이직을 해도 내 섭섭한 스펙을 가지고는 성공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나는 이직을 포기하는 대신 업을 바꾸기로 했다. 이직해 봐야 어차피 내게 불리한 회사라면, 회사가 아닌 다른 일을 준비하자. 돈이 되는 건 뭐든지 시도해보기로 했다. 보안 분야가 앞으로 유망하단 말을 듣고 IT보안 학원에 다녔다. 우리 회사와 관련 없는 최신 기술을 몰래 배우러 다녔다. 전공, 적성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영업, 회계 공부도 꾸준히 했다. 직장 말고 무엇을 해야 할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직장생활에 실력이 없었지만, 직장 밖으로 뛰쳐나갈 실력은 더 없었다. 2000년대 초 부동산 경매 열품이 불었다. 직장생활과 경매투자를 병행할 수 있다는 생각에, 책 몇 권 읽고 바로 부동산 경매에 참여했다. 네 번째 입찰에서 첫 낙찰을 받았다. 운이 좋았다. 내가 세 들어 사는 빌라 3층집이 경매에 나온 것이다. 가치분석, 위험분석이 필요 없었다. 그 집은 인테리어 유치권이 9천만 원이 걸려 있었는데, 인테리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정확히 알았다. 집 컨디션이 좋은 편이었지만 유치권 때문에 입찰자가 나 말고 법인 1명이 참여했다. 법인이 기획한 유치권이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부동산을 사고파는 일이 직장에 큰 피해를 주지 않았고, 그 후로도 부동산 투자를 계속할 수 있었다.  


동기들은 직장에서 승진 가도를 달렸다. 조직에 순응하고 성실했다. 학교에서 우등생이 직장에서도 충직하고 유능했다. 규칙을 잘 지켰고, 상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파악했다. 나는 늘 그들과 발맞추기 위해 허덕였다. 나의 노력을 현실은 늘 배신했다. 조직에서의 무능함 때문에 나는 자연스러운 아웃사이더였다. 덕분에 나는 늘 회사밖으로 밀려날 위기감 속에 직장생활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퇴사통보서가 도착하는 두려운 상상은 나를 더욱 회사밖의 전투 경험을 쌓게 했다.


입사 동기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젊음을 불태웠다. 대부분 다른 회사로 이직하고, 잘 나가던 동기는 임원 승진에 성공하기도 했다. 나는 부동산 투자를 계속했기 때문에 회사를 떠날 수 없었다. 직장은 대출 이자를 감당할 수 있게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부동산 시장이 침체기에 접어들 때 직장은 잠시 소나기를 피할 수 있는 좋은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입사 후 24년이 지나는 동안 회사는 외국 투자 회사에 합병됐다. 회사 합병 후 대표님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조직 체계는 전면 개편됐다. 대표님은 지분을 외국투자회사에 넘기고 퇴사하셨다. 그 후로도 회사는 한번 더 다른 회사에 팔렸다.  


만일 좋은 학벌과, 최적의 스펙을 갖추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더라면 나는 회사 밖으로의 도전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했었더라면, 위험한 경매 따위는 절대 도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직장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했던 그 상황이 나에게는 최고의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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