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악몽이 다시 살아났다. 30년 전에 결혼을 하고 시댁에 갔다. 설날 차례를 지내고 남자들은 여자들이 차려놓은 밥상에서 열심히 밥을 퍼먹고 있었다. 이제 부엌일을 막 끝내고 앉아서 한 숟갈 뜨려는 찬라, 남편의 "물 좀 줘"라는 말을 듣고 속으로는 열받지만 내색할 수는 없어서 물을 갖다 바쳤다. 집에서 장녀인 나는 우리집에서는 대장이었다. 그리고 우리집은 막내가 남자였지만 차별이 없었다. 그러다가 결혼하자마자 남자 집에 들어가니 여자는 종이었다. 명절의 풍경이 30년이 지난 지금은 달라졌을까? 최근 30년 만에 명절 차례를 지냈다. 평소 싹싹하고 눈치도 잘 보고 나름 배려가 있는 새남편이지만 역시 똑같았다.
어제 아침 부엌에서 한 시간 동안 주방보조를 하고 남자들은 밥을 드시는데(?) 같이 밥을 먹으려고 밥을 퍼서 상에 올렸다. 두 개 갖다 놓고 다시 한 개 더. 어머님과 형님 그리고 나의 밥 그릇을. 그런데 새남편님이 "누가 먹는다고 밥을 가져와?" 이러는 거다. 명절차례라고 오늘 떡국들을 드시고 있었던 거다.
"내가 밥 먹으려고 한다. 왜?"라고 했어야 하는데...차마 말을 못 했다.
형님은 오늘따라 남자님들이 드실 후식, 과일을 깎으며 늑장을 부린다. 나도 옆에서 깎으며 속으로
("아니, 무슨 밥도 안 먹고 후식부터 챙겨주냐.")
어머님도 마찬가지. "다 먹고 나서 먹자."
형님은 과일을 다 깎고 나서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늦게 먹냐."라고 하며 밥상으로 가서 앉는다.
26살 먹은 딸은
"아빠, 왜 여자들만 일해?"라며 이상한 풍경에 대해 말하지만 여전히 아빠는 모른다. 모른 척이 아니라 진짜 모른다. 본인은 배가 차지 않아 떡국 두 그릇을 먹으면서도 여자들이 왜 아직까지 부엌에서 밥을 먹지 않고 있는지 안중에 없다. 이것이 55세 먹은 이 시대 남자의 본성이다.
모든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오늘 기분 나빴다. 30년 만에 악몽이 되살아났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라며 줄줄 읊어댔더니,
그제야 분위기 파악은 됐는지 그 당시 아무 생각 없었다는 바보 같은 표정을 하면서 다음에는 안 그러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결혼 이후 남녀차별을 '시집'이란 곳에서 처음 한 방 맞고 사회생활 하면서 여러 방 맞고. 여전히 부엌에서 일하지 않는 남자들 때문에 여자들은 점점 더 결혼이란 게 하기 싫어질 것 같다. 어머님은 77세라서 사고방식이 굳어졌다고 하지만 50대 남자들도 여전히 이런 상태라면 과연 30년 뒤에 바뀌어 있을지 의문이다. 내 생전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