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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엘리아나 Jul 12. 2024

그가 사라졌다

한 번도 싸운 적 없이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던 우리가 드디어 첫 싸움을 하게 됐다. 그 시작은 역시나 연애 초반에 문제가 됐던 '연락'이었다.

금요일 저녁, 남자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는데 다음날 오전이 돼서야 답장이 왔다. 피곤해서 일찍 잠이 들었고, 답장을 하려니 너무 늦은 시간이라 연락을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실은 남자친구가 몇 주 전부터 주말 출근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나와 데이트도 하느라 많이 피곤하긴 했을 것이다. 주말 출근 안 하는 나도 많이 피곤한데 얼마나 더 피곤할까 싶었다. 그리고 나를 만나는 날에는 최선을 다해 즐거운 데이트를 하니 이해해 줬다.


그런데 일요일에 또다시 연락이 없었다.

연락을 기다리다 저녁쯤 카톡을 보내니 피곤해서 쉬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의문이 하나 생겼다. 남자친구의 쉼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연인에게 카톡 한 두 번 보내는 것도 쉼에 포함되지 못하는 걸까? 그에게 묻고 싶었지만 이 부분은 좀 더 깊게 얘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아서 나중에 하기로 했다.


다음날인 월요일 저녁, 남자친구가 또 연락이 없었다. 전화해 보니 잠이 들어있었다. 나이는 속일 수 없다고 40대 중반이 넘는 나이이니 체력적인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별 타박 없이 잘 통화했고, 잠들기 전에 연락 달라고 당부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다음 날인 화요일에도 아침 인사 이후, 또 연락이 없었다. 아무리 피곤하다 해도 퇴근해서 카톡 한 번 주기가 그리 어려운 일인가? 분명 전날 신신당부했는데도 연속으로 이러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전화해 보니 또 잠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 금방 전화를 끊었다. 혹시나 그에게 다시 전화가 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그도 화가 났는지 모닝톡이 오지 않았다. 우리의 첫 싸움 시작인가? 기혼자들의 조언 중 하나가 결혼 전 한 번쯤 싸워봐야 한다는 것이다. 싸웠을 때의 태도나 해결 방식을 통해 좀 더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싸우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살짝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번 싸움으로 서로를 더 알 수 있고 잘 풀면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또, 남자친구에게 우리가 싸우면 오빠가 먼저 손 내밀어 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었는데 그 말을 잘 지킬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현실은 저녁은 물론, 다음날도 연락이 없었다. 이틀이나 연락이 없으니 화가 났지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녁까지 기다리 전화를 했다. 다행히 남자친구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마음이 복잡한 나와 달리 아주 평온하게 말이다. 내 감정은 우선 뒤로 하고 무슨 일 있었냐고 걱정했다고 하니 아무 일 없다고 했다. 그럼 왜 이틀 동안 연락이 없었냐고 하니 피곤해서 그랬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연인 사이에 2시간도 아닌 2일이나 피곤하다고 연락을 안 하는 게 말이 되나? 물론, 남자친구가 주말 근무와 이른 출근으로 피곤하겠지만 밤샘 근무를 하거나 야근을 하지는 않는다.

나는 과연 그에게 어떤 존재일까?

복잡한 마음을 해결해보려고 한 전화였는데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계속 얘기하다가는 큰 싸움이 될 거 같아 우선 멈췄고 다음날 남자친구가 연락하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어떻게 해야 이 사태를 현명하게 잘 해결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마침 주말여행이 계획되어 있어서 저녁에 맥주 한 잔 하며 잘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싸움은 싸움이고 미리 계획한 여행이니 재미있게 놀고, 저녁에 잘 얘기하면 잘 해결될 거라고 희망 회로를 돌리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은 금요일 저녁, 아침 일찍부터 먼 길을 운전하는 남자친구를 위해 샌드위치를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샌드위치 빵을 사 오는 길에 갑자기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오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길 한가운데 멈춰 서서 폰을 꺼냈다.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또다시 그가 전화를 받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게 여자의 육감인 건가?

정말 그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금요일이니 피곤이 쌓여 깊이 잠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분 후,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도 안 받았다.


설마 다시는 안 그런다고 했는데 또다시 잠수인가? 아니다. 아직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없다. 진짜 깊이 잠들었을 수도 있으니 카톡을 보냈다. 하지만 30분이 지나도 연락이 없다. 다시 30분 후,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했는데 역시나 안 받았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가 사라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음 임장할 아파트를 정하고, 주말여행에 필요한 용품을 함께 주문했던 그가 사라지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되니 연락 달라는 카톡을 보냈는데 다음날에도 1이 사라지지 않았다. 잠수일 것 같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초초한 마음으로 수시로 폰을 확인했지만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의 연락은 없었다.


그리고 4일째가 돼서야 카톡의 1이 사라져 있었다. 그걸 본 순간 화가 나기보다는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3일 동안 읽지 않았던 카톡을 읽은 걸 보니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 아닐까?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을 좀 더 정리한 후, 연락할 수도 있다.  


그에게 연락이 올까? 아니면 우리는 이대로 끝일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기다리는 것뿐이다.

이 기다림의 끝이 이별일지 재회일지 모르지만 부디 이렇게 끝나지 않길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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