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강본풀이> 속 운명
"아들아, 춥다고 누워만 있지 말고 밖에 가서 운동 좀 해라. 퍼질러서 잠만 자지 말고"
겨울방학 때인 1월 겨울, 엄마는 집에서 허구한 날 누워 잠만 자던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필자는 힘겹게 일어나 나지막하게 알겠다고 대답한다. 그러고선 방에 들어가 다시 누워 휴대전화만 본다. 방학이 지나면 다시 학업과 대학 생활에 집중해야 되기에 필자는 운동이고 뭐고 마음껏 편히 쉬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어김없이 흐르는 1분 1초가 귀한 방학에 운동은 필자에게 사치였다. 애초에 운동이라는 '운명'은 필자와 궁합이 전혀 맞지 않았다.
필자는 아직 팔팔한 20대인데도 운동을 꾸준히 해본 적이 없었다. 막상 운동밖에 할 게 없다는 군대에서도 PX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고 체력단련장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체력검정 시간에 불합격만 수도 없이 해봤고 이를 불편하게 생각한 선임들이 억지로 운동시켜 겨우 합격을 따냈던 기억이 난다. 전역 이후 휴학 때는 시간도 비고 살 좀 뺄 겸 약 3달간 홈트를 했었다. 한 6kg까지 감량할 정도로 임했지만, 복학 이후에는 그렇게 열심히 했던 홈트에도 손을 뗐다. 이렇게 운동이 시도에만 그쳤던 이유로 학업, 교외 활동, 지인과의 약속 등을 들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냥 귀찮아서다. 일과를 마치면 몸에 있던 힘이 쭉 빠지니 운동에 소모하기 위한 에너지를 생성하기에는 열정이 없었다. 운동에는 관심조차 안 갔다.
그렇게 1월이 지난 2월 중순, 너무 퍼지르게 생활해서였을까. 수면하는 시간이 새벽을 넘어가니 일어나는 시간도 정오를 넘어서는 습관이 반복됐다. 낮에는 체력이 바닥난 듯 빨리 눕고 싶다가도 막상 저녁에는 정신이 또렷해져 수면에 결함이 생기는 점이 문제였다. 그래서 한창 활동해야 할 낮에 피로감만 늘고 집중력은 떨어지니 일상생활이 어려워졌다.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필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건강하다고만 생각했던 몸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이대로 살다간 개강 이후에 더 큰 지장이 생길까 더는 이 문제를 미룰 수 없었다. 한 달 전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이제부터라도 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무력해지고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고자.
그렇게 시작한 운동이 달리기였다.
저 너머 원천강에서 운명을 읽게 된 '오늘이'
'운명'하니 떠오르는 민속 신화로 <원천강본풀이>가 있다. 이 신화는 제주도 심방(무당을 뜻하는 제주 방언)들이 전하던 서사무가로, 정확히 어떤 제의적 목적으로 연행했는지 알 수 없는 '특수 본풀이' 중 하나이다.
여기서 '원천강'(袁天綱)은 당나라 초기의 역사적 인물로 점복술에 능했다. 그의 서적 중 사람이 태어난 년, 월, 일, 시로 사주(四柱)하는 '원천강오성삼명지남'이 조선조에 수입돼 명과학의 시험과목으로 활용됐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원천강은 인명, 인물로서의 존재보다 서명, 서책으로서 인식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원천강을 당나라 점술가에서 점복서 그 자체로 수용하는 용례로 나아간 것이다. 한편 제주도 서사무가 <초공본풀이>, <세경본풀이>, <당본풀이>에서도 자식을 가질 운명인가 여부를 판단할 때 원천강이 확인된다. 곧 서사무가에서 원천강은 '팔자' 혹은 '운명'으로 읽는 것이다.
<원천강본풀이>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느 날 강림들에 나타난 소녀 '오늘이'가 부모를 찾으러 원천강으로 나선다. 그러면서 서천강가 별층당의 청의동자 장상이, 연화못의 연꽃나무, 청수바다의 뱀, 장상이처럼 별층당에서 글을 읽던 매일이, 감로정 우물물을 퍼내는 선녀들을 차례로 만난다. 오늘이는 그들에게 각자의 사연을 듣고 길을 인도받은 끝에 도착하나 문지기가 들여보내주지 않는다. 그러자 오늘이가 서럽게 통곡할 때 울음을 들은 신관이 오늘이를 부르며 비로소 부모와 만난다. 부모는 옥황상제의 부름에 원천강을 지키고 있었으나 항상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선 오늘이에게 사계절이 모여있는 원천강을 구경시켜 준 뒤 장상이와 매일이, 연꽃나무, 뱀의 사연을 듣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선녀들의 사연은 친부모와 재회 전 이미 오늘이가 구멍 뚫린 바가지를 고쳐 우물물을 다 퍼 근원지로 돌아갔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이는 다시 귀환하는 동안 사연을 밝힌 이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옥황상제의 부름으로 원천강의 사계절을 세상에 알리는 선녀로 거듭난다.
이 신화는 운명을 읽는 능력을 획득하기까지 오늘이의 여정을 부모탐색담과 결합해 그린 것이다. 시간을 주재해 사계절이 순환하는 원천강의 근본을 제주도 지역만의 방식으로 풀어내, 다양한 존재와의 상호 관계 속에서 운명이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지점을 마련한다.
삶을 개선하려면 운명을 알고, 운명을 알려면 '오늘'을 알자
주목할 점은 오늘이의 행동력이다. 오늘이는 적막한 들에서 이름도 모르고 외로이 나타난다. 벗이라고는 학 한 마리뿐인 세상에 던져져 홀몸으로 고독을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도 운명에 맞서 부모를, 그리고 자신을 찾고자 원천강으로 향한다. 조연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계를 넘나드는 원천강을 발견한 오늘이는 항상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던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만물의 흐름인 운명을 읽어내는 능력까지 획득한다. 그렇게 이계를 오가며 이승에서 파악할 수 없는 운명을 인간에게 번역해주는 신으로 좌정된다. 외로움, 번민으로 얼룩진 삶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오늘이의 굳센 행동력은 필자를 포함한 독자들에게 삶을 개선하기 위해선 운명을 알아야 한다는 운명관을 깨우치게 한다.
특히 친부모를 만난 뒤 조연들의 사연을 해결해주는 오늘이의 귀환은 '나', 곧 개인은 외톨이가 아닌 만물 속 소중한 근본임을 확인시켜 준다. 글만 읽어야 했던 장상이와 매일이는 고독을 극복하는 부부의 운명으로, 꽃이 피지 않던 연꽃나무는 유일하게 꽃이 남아있던 윗가지를 꺾자 다른 가지들에 꽃을 피는 만개의 운명으로, 용이 되고 싶던 뱀은 야광주 두 개를 뱉어 승천하는 용의 운명으로 나아간다. 이들은 모두 원천강으로 향하는 길을 알았으나 보이지 않는 이계의 저편에 막혀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이와의 만남으로 결핍을 해소하고 만물을 받아들이자 비로소 세상과 하나가 되는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따라서 결핍된 존재들이 어울려 서로의 결핍을 채우고, 욕심을 제어하며 지나친 욕망에서 벗어나야 존재론적 전환을 도모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오늘이의 행동력은 운동과 맞지 않는다는 편견에 빠진 필자를 반성하게 만든다. 몸상태의 위험성을 느끼기 전까지 '귀찮다', '시간 없다'는 벽에 막혀 몸과 마음을 가꾸는데 회피했었다. 그러나 겨울방학 끝물이 돼서야 심각한 몸상태를 알게 되면서 앞으로의 삶에 있어 더 기구해질 운명에 망설이지 말아야겠다고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이날부터 비교적 쉽게 실행할 수 있는 달리기를 시작했고, 지금 글을 쓰는 시점까지 달리기 운동에 매진하게 된 것이다. 당시 그날, 그러니까 위기감을 느꼈던 그 '오늘'이 아니었다면 필자는 피폐한 삶의 굴레에 발버둥을 칠 것이 뻔했다. 결국 삶을 개선하려면 삶의 파편들이 모여 자신을 사로잡던 복속된 운명을 알아야 하고, 운명을 알려면 이를 깨닫게 된 '바로 지금', 곧 '오늘'을 알아야 했다. 그래야만 그 순간의 의미를 영원히 간직하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것이니. 정말이지 오늘이에게 많이 배운다.
어김없이 달리자. 오늘이처럼
그렇게 저녁마다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됐다. 갑자기 살이 빠졌거나 홀쭉해지는 큰 변화는 아직 없지만, 밤보다는 낮에 더 활발히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규칙적으로 달리다 보니 체력이 향상되면서 일상에서 느낀 무기력함을 다스릴 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처음에는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뛰기 힘들었으나 한 바퀴만이라도 더 달릴수록 따라오는 성취감이 좋았다. 이때까지 짓눌렀던 무기력이 모아져 만들어진 기구한 운명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는 다짐이 필자에게 열심히 달릴 의지를 불어넣는다.
<원천강본풀이>의 오늘이는 자신의 고독한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존재 근본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원천강'에서 획득한 ‘운명’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성장했다. 삶의 고독을 단계적으로 극복해 신계로 나아간 오늘이를 보며 필자는 '지금'을 알 수 있는 ‘오늘’에 집중해야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필자는 더 발전하기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