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은 순전히 카오산로드 때문에 가고 싶었다. 하도 카오산 카오산 많이 들어서 대체 거기에 무엇이 있고, 어떤 곳인지 꼭 가보고 싶은 리스트에 넣어 둔 곳이었다. 늘 그렇듯 어떤 계기나 계획도 없이 2020년 1월 13일 수완나품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티켓을 끊었고, 라오스에 있는 N에게 당연하듯 연락을 취했다.
-방콕에 들렸다, 갈게요.
-그래
-뭐 필요한 거 있어요?
-밥통이 고장 났는데.
밥통을 정말 사들고 가야 하는 거야, 미심쩍어하면서 J와 나는 정말이지 밥통을 낑낑 들고 공항으로 향했다.
이곳에 오기까지의 과정들을 까맣게 잊고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떡 하니 이 공간에 이 생경한 곳에 놓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오산 로드샵에서 산 노란색 원피스를 맞춰 입고, J가 한국에서 미리 예약한 왓 아룬이 보이는 레스토랑에 앉아 있던 이 순간이 궤도를 이탈한 비현실 같았다. 금빛에 둘러싸인 왓 아룬이 멀리서 보이고 뜨거움이 물러간 공기가 선선했고, 잔잔하고 고요한 강이 흐르는 풍경 안이었다. 열 손가락이 접히도록 그녀와 떠나온 여행들이 삶 곳곳에 흐른다. 그런 J와 비현실 같은 오늘, 다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짠맛이 도는 음식과 맥주를 잔에 따르면서 이런 시간을 또 가짐에 무한히 감사하고 감사했다. 가고 싶고, 보고 싶을 때 떠나 올 수 있어- 가능케 해준 가족과 친구와 시간과 물질... 모든 순간들에 눈물겹게 감사했다.
얼마 전, J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거나하게 취한 모습의 내가 있었다.
"20대 같지?"
미친 소리를 하는 내게 미친년, 이라는 말이 돌아오고 깔깔 웃으며... 나는 그 사진을 오래도록 봤다.
눈, 코, 입이 잘 생겨서가 아니었다.
그 시절의 내가 시간과 공간 안에 너무 예뻐서(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뒤늦은 나이에 J와 그 모든 시간들을 누림에 꿈같기도 해서.
가지지 못했으면 어쩔 뻔했는지 순간 아찔했다.
방콕 레스토랑에 앉아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하다 울컥 올라오는 마음을 밤공기에 흘려보내고 느긋하게 놀다 환전한 돈을 맥주값으로 모두 지불하고 나니, 돌아갈 차비가 없다는 걸 바보같이 뒤늦게 깨달았다.
이토록이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그런 날이었다.
이런.
후. 나쁘지 만은 않은 탄식이 나왔다.
다음 날, 발생한 '사고'에 비해 이런 사고쯤은 애교에 불과했다.
여하튼 카오산 로드로 돌아가야 한다. 자동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한국인을 발견하고는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고, 흔쾌히 함께 가요-라는 말을 들었다. 친절한 여행 동지 덕분에 절정을 향해 치닫는 카오산 로드 밤거리에 무사히 내렸다. (고마워요! 정말! 감사했어요!)
카오산이 배낭 여행자들의 '성지' 라면서 요?- 늘 묻기만 했는데 눈으로 직접 보니 가히 그럴만한 이유가 다 있었다. 모가 난 모습으로 까칠하게 굴러갔던 사람들이 세계는 하나라는 듯 모두 둥글게 둥글게 굴러가는 듯했다. 그 유명하다던 맥도널드 할아버지께 정중하게 인사도 하고, 먹고 싶었던 끈적 국수와 땡모반도 먹고, 등이 파인 원피스를 입고 카페도 가고, 큰 규모를 가진 야시장에서 몸통만 한 돼지등뼈찜도 먹었다. 무엇보다 방콕의 '꽃'인 카오산 로드의 밤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카오산 로드는 보는 게 아니고 진정 '맛' 보아야 한다고 감히 말하겠다. 밤이 되면 밤거리를 비추는 조명 아래 흥분과 광기가 어린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터질 듯한 음악 속에서 먹다가도 몸을 흔드는 곳이 즐비했고, 술병을 손에 쥔 채 거리를 활보하는 세계의 사람들이 부끄러움이라고는 태초에 없었던 듯 흘러나오는 리듬에 몸을 맡겼다. 한낮에는 마사지를 받으며 낮잠을 자고 부스스한 얼굴로 '팟타이'를 먹었다.
"내일 또 올게"
낯이 익은 레스토랑 직원과 친구처럼 인사를 나누고 다음 날 또 가서 팟타이를 먹고 어슬렁 돌아다니다 다시 마주친 직원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게 되는, 저기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신나고 재미있는 게 가득한 친근한 옆동네 같은 곳이었다.
알찬 이틀을 보내고, 방콕에서 3일째 라오스를, N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
카오산에서 산 바지를 J와 나란히 입고 인사를 나눈 직원이 있는 레스토랑에서 볶음밥과 팟타이를 배부르게 먹고, 카오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진 한 장도 남겼고, 커피도 마셨다. 택시를 불러 공항으로 이동해 '비엔티엔'으로 가야 한다. 교통을 비롯한 예약 이모저모를 알아보는 건 대부분 J가 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여행 경비를 관리했다. J가 부른 택시가 약속 장소로 왔다. 굵은 모발의 곱실거리는 머리가 어깨까지 닳는 길이에 푸근한 인상을 풍기는 아주머니가 어딘가 붕 떠있는 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형식상의 말들을 주고받았고, 기억나지 않는 음식을 뒤를 돌아보며 불안한 못 짓으로 내밀었다. 몸짓과 표정과 말투에서 어딘지 모를 어수선함들이 어렴풋이 느껴져 자꾸 신경이 쓰였다. 내내 일거리를 기다리다 마침내 일을 따낸 사람의 모습과 흡사했다.
태국의 교통체증도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로를 빽빽이 채운 차들이 줄지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온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J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찰나였다.
쾅.
화이트 아웃.
정신이 나갔다 돌아왔다.
작은 마찰음과 함께 강하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은 충격이 뒤쪽으로부터 느리게 느껴졌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기사는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렸다. 태국 공항으로 가는 도로 한복판에서 때 아닌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 J는 우리 택시기사가 속력을 내다 갑자기 멈췄다며 어딘가 산만하더니... 라며 혀를 끌끌 찼다. 뒤에서 오던 차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듯했지만 완벽히 멈추지 못하고 택시의 범퍼를 들이 박고야 말았다. 사고로 인해 택시 기사의 신분증을 본 J가 '나이'까지 속였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여러모로 어딘지 '이상하다' 고 느끼게 한 택시기사임에는 분명했다.
J와 함께한 여행 동안 루앙의 비행기표가 거품처럼 사라진 일도 있었고, 지불한 호텔비를 다시 내라는 일도 있었지만... 접촉사고까지 날줄이야. 순간의 당혹스러움과 머릿속이 하얘지던 순간이 떠오른다. 택시 기사는 일하는 중에 뒤에서 일방적으로 박아 자신도 피해를 입은 속상한 '피해자'였고, 뒤에서 박은 '가해자'는 여러 날 중 운도 지지리 없는 그저 그런 되는 일 하나 없는 하루였을 뿐이었다. 택시에 있던 우리는 골절도 타박상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과조차 받지 못한 '이방인'인 채로 어안이 벙벙하게 공항으로 향했다. 사고 처리를 위해 공항에 체류하며 뜻하지 않은 가해자, 피해자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인 채 대치상황이 이어졌다. 체류하는 동안 공항 직원이 오고 가고, 우버 상담 직원과 여러 차례 통화를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크게 다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지만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진심 어린 위로의 말조차 받지 못했다. 답 없는 고집을 피우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팔짱을 낀 채 노려보던 작은 체구의 남자의 표정을 보고 남의 나라에 와서 너희가 어쩔 거냐, 는 식의 태도에서 가만히 갈 수가 없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감정이 더 격해져 갔고,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버 상담 직원과 한국으로 돌아가면 필요한 서류를 준비한 뒤 연락을 달라는 마지막 통화를 끝으로 결국 다가오는 비행시간을 포기할 수 없어 비행기에 올랐다. 이 일로 인해 우리도 괜한 시간을 쓰고 감정을 소모하고 사고까지 겪었으니 미안하지만 택시비는 줄 수 없을 거 같다고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곧 울 거 같았던 기사의 표정에서 막 만났을 때 불안했던 생기가 겹쳐 떠올랐다.
휴.
그의 안쓰러운 상황을 살피기엔 나 역시 피해자였고, 속상함과 억울함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숨이 나왔다.
1시간 뒤, 공항으로 마중 나온 N을 만났다.
늘 가던 메콩 강변에서 우리 이야기를 들은 N이 말했다.
"피가 철철 나지 않는 이상 그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아. 안 다쳤잖아! 그럼 됐어"
역시 N은 어떤 일이든지 간에 별 일 아닌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별 일'을 다 겪고 산 사람만이 부릴 수 있는 여유이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비엔티엔에 왔고 라오스와 N을 다시 만났다. 늘 가는 메콩 강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앞으로의 여행은 다시 새롭게 적으면 되는 거였다. 여행 중에 만난 뜻하지 않은 사고조차도 지나고 나면 소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팔짱을 낀 채 J와 나를 노려보던 그 태국 사람은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을 거 같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씁쓸한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