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라오스 시절을 사랑했다. 마음을 훤히 드러내 놓고 우리의 관계를 끌어안았다. 지금에 머무르며 내일에 기웃거리지 않았다. 오랜 시간 이런 마음을 어떤 형태로든 명명하고 싶었지만. 길을 찾지 못했고, 제 몸에 꼭 맞는 단어를 고르지 못했다.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번지고 스며들었다. 그뿐이었다. 더 설명할 자신이 없다.
네 번째 라오스행 비행기에서 막 내렸다.
여전한 N이 서있다.
익숙한 공항이 제 집처럼 편안하고 한 해 두어 번 보는 N이 여전히 반가웠다.
우리가 맞이한 여러 날의 밤 중, 가장 편안하고 따뜻하고 슬픈 밤이었다.
까맣게 지고 만 밤이, 우리의 시간이 순간순간 무르익어 갔고, 횟수와 상관없는 인연에게서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를 들었던 밤이었다.
견고한 것보다 위태로운 것에 더 마음이 갔다.
하얗게 반짝이는 것보다 까맣게 빛나는 것에 더 마음이 쏠렸다.
흉터가 보이고, 상처가 보이는 사람 편에 서 있고 싶었다.
그의 사연은 슬펐지만, 우린 모두 접어 놓고 차마 펼칠 수 없는 슬픔 하나쯤은 감추고 사니 꿋꿋하게 걸어 행복한 길로 들어서자고 손을 잡아주고 싶은 밤이었다.
메콩강이 보이는 강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인천공항에서 사 온 육포를 꺼내고, 즉석에서 구워주는 안주를 시키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먹고사는 문제는 언제나처럼 녹록지 않았고, 힘든 하루가 이어지는 현실이었지만 우린 웃는 얼굴로 서롤 마주했다.
힘 겨운 일상은 잠시 던져두고 서로를 응원하는 위로와 애정이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애정과 관심이 힘든 현실을 견디게 해 주며 다시 일어서게 하리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자정을 막 넘긴 시간에 메콩 강변에서 우리의 주제곡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가 무슨 운명처럼- 드라마틱하게 울려 퍼졌다.
J와 나는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채 소리를 지르고 눈을 반짝였다.
"내가 유일하게 완곡하는 팝송이잖아"
N은 멜로디에 자신의 목소리를 얹었다.
J와 나는 기회가 오면 이 특별해진 노래를 어디서든 신청하고, 우연히 듣게 되는 날에는 두 눈을 마주치고 학창 시절 누군가를 짝사랑한 여고생처럼 들뜬 마음을 주고받았다.
누군가 머물다 간 텅 빈 테이블에 달빛이 쏟아지고, 하루를 마감하는 손길들이 분주했던 곳에서 우리의 시간이 초라함을 등에 업고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새로 산 니트를 입고, 내가 좋아하는 링이 귀에서 반짝거린 J가 N과 함께 운명 같은 노래를 따라 불렀던 그날이, 할머니가 되어서도 그리울 거 같아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리움은 늘 슬픔을 동반했고, 웃으면서도 슬퍼지며 아직 지나가지 않은 시간에서 벌써 이 날을 그리워했다.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이 하루를 두고두고 기억할 거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유토피아 상자에 잘 포장해 넣어 두고 보고 싶을 때 꺼내 보았을 때, 그 시간이 우스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상하고도 진지한 희망이 생겼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보이는 모든 것들에게까지 우리의 진심을 고스란히 밤하늘에 새기고 싶었다.
강변 식당에서 마지막 손님으로 나와 긴긴밤을 함께 보내며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비어라오를 사는 J와 N의 모습을 보았다.
그 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하게 행복했다.
별거 없는 우리가 서로에게 생의 잠깐이라도 머무는 위로가 됐으면 싶었다.
음악을 듣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원치 않게 끝나버린 슬픈 사랑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지난 시간에 대한 회고를 덤덤하게 들었다. 눈앞에 없는 이의 얼굴을 그리며 말하는 것에 대한 지난한 슬픔을 짐작할 수 없고 가늠조차 되지 않는 이별 앞에 무어라 말할 수 없어 그저 고개를 숙였다.
N이 선곡한 UN의 '선물'을 N과 함께 부르다 순간 노래를 멈춘 J가 "우리가 선물이지 않을까요?"라고 N에게 불쑥 말했다. N은 노래를 이어 부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줄줄이 뿜어지는 연기에 의지하지 말고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매일매일 행복할 순 없지만 가끔 행복의 길로도 좀 가보라고 도닥이고 싶은 마음이 N에게서 늘 들었다.
다정하게 마음을 전하는 J의 목소리와 입가의 미소가 번지던 N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에둘러 전한 우리의 진심이 그에게 닿기를 바라고 바랐다.
이미, 오늘이었던 해가 뜰 준비를 할 때
사랑하는 라오스가 하얗게 밝아졌을 때
J와 나는 N을 배웅했다.
나는 한사코 해장을 해야 한다 했지만 N은 호텔 창에서도 보였던 지치고 고된 삶이 곳곳에 묻었을 자신의 집으로 오토바이의 거친 소리를 내며 꿈같이 사라졌다.
공허한 마음을 끌어안고 부스럭거리는 호텔의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제야 잠이 쏟아졌다.
우리의 시절이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