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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Nov 10. 2021

할머니! 할머니는 꿈이 뭐야?

"쌀밥을 많이 많이 먹는 거야"

제주도에서 친정 엄마와 두 아이와 한 달 살이를 할 때였다.


6월의 제주, 동쪽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들이 대뜸 묻는다.

나는 운전대를 붙잡고, 하얗고 귀엽기도 한 몽글몽글한 구름이 차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붙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할머니"
"응"

"할머니는 꿈이 뭐야?"

(한 번도 생각지도 못한 말에 너무도 깜짝 놀랐다. 엄마에게 그런 질문조차 가능한 것인지. 그런 생각도 해보지 못한 채로 삶은 그저 흘렀으니까.)


깜짝 놀란 건 나뿐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아들아이의 질문에 뭐라 답할지를 찾지 못한 엄마는 배에 포개진 두 손을 힘껏 위로 올리고는 마침내 입을 뗐다.


"음... 쌀밥 먹는 게 꿈이었어"

그것이 마치 너무 부끄러운 일이라는 듯 엄마의 주름진 목소리가 목울대에서 가냘프게 흔들렸다.


며칠 뒤,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할머니를 만난 아들이 차 안에서 다시 묻는다.

"할머니! 할머니는 꿈이 뭐야?"

"쌀밥 먹는 게 꿈이었어. 쌀밥 많이 많이 먹는 게 꿈이었어" 엄마는 곧장 힘주어 이야기했다.  

"왜 그게 꿈이야? 쌀이 없어?" 아들이 천진하게 되묻는다.

그런 게 어떻게 '꿈'일 수 있냐는 듯. 되묻는 아들에게 그때는 그랬다고 할머니는 그랬다고 설명하지만 아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그래, 한번 도 물을 생각조차 못했던 엄마의 꿈이 뭐였을지 내심 궁금증이 증폭됐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명치에서부터 올라온 뜨거운 것이 그 자리를 가득 메웠다. 보이지 않고 흘러간 세월이 엄마의 눈앞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을 테고 그것을 곧 쓸쓸한 모양새로 흘려보냈을 것이다. 나는 그 씁쓸함이 도는 회한의 표정이 엄마의 얼굴에서 머물다 빠르게 스쳐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십여 년 전에 보았던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여주인공이 큰 대접에 밥과 반찬을 모조리 쏟고는 고추장을 넣고 참기름을 두르고 밥 숟가락으로 퍽퍽 섞어 입안 한 가득 밥을 욱여넣고 씹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남자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화면 속에서 흘러나온다. '짱변이 개밥을 먹는 이유는 요리하는 시간을 아낄 만큼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다. 많이 고단했을 거 같다'


그 장면에서 엄마 생각이 났었다. 엄마도 꼭 그렇게 밥을 먹었다.

큰 대접에 밥을 가득 넣고 몇 가지 되지 않는 반찬을 넣고 비벼 먹던 엄마의 모습이. 양쪽 볼이 부푼 채 밥알들을 씹는 엄마 모습에서조차도 나는 슬픔을 읽었다. 비벼 먹을 찬이 없을 땐 늘 청양고추를 썬 된장국에 하얀 밥을 말아먹었다. 숟가락에 올린 밥알 위로 손으로 찢은 김치를 올리고는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두 번째 모습이었다. 엄마는 일주일에 두세 번을 국수 또는 칼국수를 삶았다. 삶아낸 국수에 멸치를 우려낸 국물을 부어 간장과 파와 고춧가루를 넣어 만든 양념을 뿌려 국수를 먹었다. 아빠의 폭력이 없는 날에 "어이 국시 좀 삶아라" '국시'라고 말하는 아빠의 말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국수를 분주히 삶아 아빠와 마주 보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국수를 먹었다.


밀려드는 허기에 음식물을 채우는 행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 살고자 하는 의지.

굶주려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행동거지.

먹는 것이 곧 숨을 쉬고 살아가는 유일한 일이라는 듯, 엄마는 먹는 것 외에 어떤 위로도 없다는 듯 밥알을 열심히 씹고 빠르게 삼키고 다시 밥을 입속으로 가득 넣었다.

불행을 꼭꼭 씹어 삼키며 무슨 일이 있어도 불사조처럼 살리라 마음먹는- 일종의 투지 같아 보이기도 했다.

'밥'을 대하고 먹는 엄마의 모습 속에서 내가 느낀 것들이었다.


견딜 수 없을 거 같은 세월을 이고 걸으며 열심히 살아온 덕분에 엄마는 이제 '쌀밥'을 많이 많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더운밥을 먹고 하얀 쌀 포대가 떨어지지 않도록 채우고, 다양한 반찬을 할 만큼의 경제력을 갖춘 엄마는... 그렇다면 꿈을 이룬 것일까. 누구에게나 있었을 법한 배고픈 시절에는 그저 쌀밥을 배불리 먹는 게 전부였을까. 다른 꿈을 가져 보는 거 조차 사치였을지 모를 시절을 밟고 걸어와서는 '꿈이 뭐야?'라고 묻는 아이의 질문에 엄마의 솔직한 답변은 무어라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아빠의 '사건'이 있었던 이후, 엄마는 나와 부산의 한 호텔에서 김연복 셰프의 '멘보샤'를 먹었다. 멘보샤를 먹고 와서 오성급 호텔 발코니에 앉아 엄마는 기장 앞바다를 바라보며 아빠랑 자동차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꿈처럼 이야기했다. 엄마의 세상이 또 한 번 와르르 무너지던 날- 나는 오성급 호텔도 멘보샤도 배불리 먹는 밥도 심지어 나조차도 그 무엇으로도 엄마를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빠의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서있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버린 듯한 무력감이 삽시간에 몰려왔다.   


엄마는 새벽에 일어나 걷고 걸었다. 동이 트기 전에 나가 동이 트고 돌아와서는 늘 그랬던 것처럼 살았다. 그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일이라는 듯 엄마는 자신의 삶을 살았다. 습관처럼 아빠와 식탁에 마주 앉아 국수를 삶고 더운밥을 배불리 먹었을 테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이제는 존중해야 할지도 모를. 어쩔 도리 없이 몸에 배어 버린 엄마가 삶을 사는 방식이었다. 돌봐줄 부모님이 없고 마음을 나눴을지도 모를 언니도 금방 떠나보내고 오빠들 틈에서 마음 둘 곳 없이 먹고살아야 했을 것이다. 가난은 의식주와 곧장 연결되었을 테니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엄마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다 알 거 같다는 주제넘은 알은척도, 안쓰럽고 가여워하는 마음도, 어쭙잖은 위로와 진심을 담았을지도 모를 칭찬까지 하지 않기로 한다. 고개가 숙여지는 생과 역사와 과거 앞에 형식적인 모양새를 버리기로 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배고픈 삶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친구 모임이 있었던 식당에서 엄마의 발을 본 한 역술인이 연고도 없는 엄마에게 한 말을 나는 두고두고 혐오하고 경멸했다. "굶어 죽지는 않는데, 평생을 혼자 벌어먹고 살 팔자네" 아빠의 끊이지 않는 바람기를 두고 고모가 엄마에게 한 말을 나는 분노를 가득 담아 마음에 새겼다. "그리 살 팔자 인가 봐"

그런 말들은 차마 놓을 수 없어 살아낸 하루하루가 포개져 결국 삶이 되어버린 사람 앞에 더운 쌀밥을 앞에 두고도 비수가 되어 돌아와 엄마를 또다시 무너지게 하는 영혼을 죽이는 잔인한 말이었다.   


내가 가진 신념과 가치와 믿음, 세상에 대한 기대에 팔자라는 생은 없다고. 그런  없다고. 엄마에게 신경도 쓰지도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나는 속에서  토해내며 울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엄마에게 보여줘야 하는지 명확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퇴직을 하고도, 간간히 알바를 하는 엄마를 본다. 그날 번 돈으로 찬거리를 사고, 손주들 옷을 사고 생일 선물도 사고 친구를 만나고 맛있는 밥도 먹을 테다. 또다시, 배신한 아빠와 한 지붕에 누워 있는 엄마를 상상한다.

매 번, 눈물이 올라오지만 별 수 없다. 엄마를 이해하려는 마음도 포기했다. 모든 생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도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분명한 건, 엄마는 여전히 행복이든 불행이든 삶을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는 거다. 살고자 하는 걸음이 생생하게 내게 전달되고 있다는 거다. 불행을 이면서도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거다. 오늘은 그런 엄마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야겠다.


고생 많았어. 엄마.

살아내줘서. 고마워.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쌀밥이 먹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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