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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Jan 04. 2022

스무 살 통증

이라고 쓰지만 로망이라고 마침표를 찍고 싶은

스무 살에 처음으로 알바를 해 돈을 벌었다. 편의점 알바였다. 당시의 시급은 1.800원. 요즘의 시급을 운운하는 초등학생에게 이모는 1.800원 받았다고 하니, 놀란 목소리로 몇 번이고 진짜냐고 물었다. 용돈을 벌어야 했던 친구와 내가 함께 시작한 알바였다. 친구와 일을 교환할 때쯤인 자정엔 항상 켜 놓은 스피커에서 정지영의 'sweet music box'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스무 살이 느낀 고단함과 삶의 무게가 솜처럼 가벼워지고 비로소 스무 살 된 듯 마음이 환해졌다. 안정적인 목소리에서 무한한 안정감을 느꼈다.


보기 좋게 미대에 낙방한 내게 엄마는 자격증 취득 학교를 내 의견은 묻지 않고 등록하고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서류를 들고 학교를 찾았다. 낙방의 좌절은 뜻밖의 장소에서 맞닥뜨렸다. 지원한 대학교를 모두 떨어진 대가는 너무도 컸다. 한번 도 접해 보지 못한 생소한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에 모인 40여 명의 낯선 얼굴들 틈에 끼여 칠판 앞에 선 강사의 외계어 같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동그마니 앉은 채로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는 별안간 벌떡 일어나 강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친구들은 첫날 울며 집에 간 애로 나를 딱 기억했다. 어두운 얼굴로 전철로 가는 나를 향해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 만원을 주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남지 않는 돈을 들고 전철로 향해 강의실에 도착해서는 오로지 잠만 잤다. 그날의 숙제는 그날 배운 이론이 아니었다. 만원으로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한 낮을 누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우습게도 천 원짜리 몇 장을 들고 풀 수 없는 숙제를 들고 끙끙거렸다. 점심시간이 고역이었다. 그 시절 나는 친구들에게 '그지'라고 불렸는데,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적절한 별명이라는 생각 하며 종종 친구에게 점심을 얻어먹을 수 있어 고마웠다. 한 시절 불린 내 별명을 듣고 놀란 이의 눈이 나를 더 비루하게 했다.


점심시간이 고통이 되어갈 때쯤이었다. 편의점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소소하게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잘한 기회들을 잡았다. 이를테면 짜장면 말고도 탕수육을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거와 같은. 돈을 쥐고 새벽이 되면 종종 젊음에 취해 있었다. 친구와 소주팩을 들고 슬픔을 노래하듯 한탄하고, 깔깔 거리며 밤거리를 쏘다니고 거나하게 취한 채로 집에 들어갔다. 초저녁부터 빈속에 마신 알코올이 나를 잠식하고 노래방에서 질질 끌려 나와 18평 아파트 비좁은 화장실에서 구토하며 스무 살의 실패와 단전 아래에 살고 있는 오래된 슬픔을 웃어넘기고 싶었다.


마음이 딱 맞아 좋아한 줄 았았던, 첫사랑에게 놀랍도록 아프게 채이고 나서는 친구들과 함께 더 시끄러운 밤을 보냈다. 부천에서 막차를 놓쳐 택시를 타고 집으로 걸어오면 거리는 그림자 하나 없이 늘 적막했다. 어떤 날은 바지를 내린 변태가 내 옆에 있기도 했다. 어떤 날은 13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턱 내릴 때쯤 말끔한 차림의 웬 남자가 서류가방을 들고 내 등을 찌르며 "역에서부터 따라왔는데 따라오는  몰랐어요?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 있어요? 연락처  알려주세요" 하는 말을 알아듣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멍 때리는 거 말고는 도무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순간. 고등학교 때 아파트 입구에서 내 어깨를 뒤에서 잡고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손가락을 찐득하게 움직여 주무르던 변태를 만난 뒤로는 '여자'는 밤에 변태들의 표적이 됨을 알았다. 도깨비라도 되는 듯 계단 난관을 폴짝 뛰어 감쪽같이 사라진 그 미친놈에게 아무도 벌하지 않은 현실 앞에 나는 오로지 분노와 불같은 화를 품고 살았다. 그러니까 나를 엘리베이터까지 쫓아와 연락처를 묻는 이 남자는 변태짓을 하지 않아서 용서받을만한 사람일까. 에 고민하다 거절한 내게 어떤 해코지도 않은 그는 정말 신사일지도 모를 일이었다는 거다. 한 낱 멍 때리는 사건에 불과하다고 여기며 기갈나게 놀다가 마치 처음 접해본 단어라는 듯, 슬픔을 새롭게 꺼내 새롭게 적어 내리며 슬퍼했다. 엉망진창으로 놀고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폭발하듯 울었다.


스무 살은 느닷없는 통증과도 같았다. 


조용한 집에 누워 있는데 별안간 오른쪽 아랫배에서 몰려오던 통증과도 같은. 스무 살에 처음 만나 언니와는 슬픔을 공유한 채 세상 노래도 찬양도 매 순간 진진하게 함께 불렀다. 서로의 슬픔을 말하고 현재의 행복을 기뻐하며 미친 척 놀았던 언니가 나를 병원에 데려갔다. 스무 살 흔적을 길게 새겨 놓은 의사는 맹장이 컸다고 얘기하며 길고 진한 수술 자국을 변명했다. 더 이상 깜깜한 밤에 변태를 만날 일 없게 해 준 남자 친구는 병원에 누워 고통을 호소하는 내 귀에 이어폰을 꽂아 주었지만 그와도 안녕을 고했다.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고 알바를 해 번 돈을 흥청망청 쓰고 나니 스무 살 절반이 지나있었다. 미대 진학을 위해 3년간 엄마가 번 돈이 의미 없이 공중분해되었고, 실패한 딸을 위해 서울까지 가서 자격증 학교의 등록금을 냈던 엄마는 공부는 안 하고 술을 먹고 꼬꾸라지는 나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은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엄마에게 말할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돈이 필요해 엄마의 금 가락지를 단 돈 오만 원에 팔고 온 날도 엄마는 잠자코 있었다. 번 돈을 모두 쓰고 십원 한 장 엄마에게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너 실컷 쓰라고 내버려 두었다는 말을 했다. 늘 치밀어 오르던 화가 물러가고 마른 웃음이 입가에 머물다 사라졌다. 그렇게 하고도 채워지지 않았던 엄마의 빈자리에 대해 생각했다.


미대에 갈 수 있으리라는 꿈은 번잡한 현실 앞에 너무 멀게만 보였다. 3년 동안 다닌 입시 미술학원을 매일 들락거리며 나는 나의 그저 그런 소질을 눈으로 매번 확인했다. 뛰어난 소질을 안고 모인 입시생들의 그림 앞에 내 그림은 볼품이 없었다. 얼마 전 엔, 옷깃에서 흡연 냄새가 나고 진한 쌍꺼풀에 짧은 머리의 중성적인 매력이 있었던 미술 학원 선생님이 꿈에 나왔다. 내 그림을 보고 '톤이 좋아'라고 했던 선생님은 남자 친구와 싸운 날이면 인상을 쓰고 내 그림 앞에 앉아 꽤 오랜 시간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아니, 본인의 그림을 그렸다, 라는 표현이 더 옳겠다. 톤이 좋아,라고 했던 말은 톤 말고는 좋은 게 없다는 말처럼 들려 그 말을 듣고 좀처럼 그림에 자신감이 붙지 않았다.


학교와 떨어져 있었던 미술학원에 가기 위해 나는 늘 남색 교복을 입고 인천과 부천을 오갔던 버스를 탔다. 15분을 달려 학원 근처에서 내려 어떤 날은 슈퍼에서 산 라면을 옆구리에 끼고 즉석떡볶이 집으로 향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떡볶이를 저녁으로 먹고 슈퍼에서 사 온 라면을 한번 더 넣고 밥까지 볶아 먹었다. 교복 치마 단추를 풀고 이젤 앞에 앉아 있으면 오로지 그림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지긋지긋한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그럴듯한 이유였다. 


미대에 진학하지 못한 실패자의 얼굴로 스무 살의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을 때쯤,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엄마가 내 준 등록금을 또 공중분해시킬 수 없어 밀린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취득했다. 스스로 번 돈으로 입시 학원을 등록해 1년 동안 다시 준비해 보자 마음먹었지만, 그마저 실패했다. 사방에서 덤비는 문제와 갈등에 마음은 하루하루 껍데기가 벗겨지고 허물어져 갔다. 시간에 나를 던져두고 젊은 시절이 마음대로  흘러가도록 두었다. 오늘에 놓인 일을 하나씩 하고 오늘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그림도 미대도 중요해지지 않았다. 부유하지 않고 간절하지 않은 마음에 현실도피의 환상이고 로망인 채 멀리멀리 달아났다. 여전히 못 이룬 꿈으로만 존재하는.


지나온 스무 살은 내 생애 가장 잊지 못하는 젊은 날이며 매일 아침 밀려온 통증과 함께 기지개를 켜고 밤마다 내 웃음소리가 온 세상에 퍼져 나갈 정도로 크게 울고 웃으며 밥만큼이나 술을 많이 먹었던 불안으로 얼룩진 자화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스무 살의 시간을 가장 많이 떠올린다. 거울 앞의 지난 시절이 쌓인 내 얼굴을 보며 사라진 스무 살 얼굴을 더듬더듬 찾고 애쓰고 잘 버텨 왔다고 도닥인다. 불안조차 예뼜다고 떠올린다. 그리고 상상한다. 미대에 들어간 내 모습을. 매일 그림과 씨름하며 캠퍼스를 누리는 내 모습을. 여전히 그것이 내 마음에 가장 큰 로망임을. 무척 잘 어울렸을 거라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확신한다. 좀처럼 이 확신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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