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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Dec 27. 2021

공감 없는 불행의 위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위로

사랑하는 친구가 있다. 마음을 나눈 나의 최초의 친구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난 친구와 나는 특별한 연유 없이 대번 친구가 되었고, 단짝이 되었다. 나의 학창 시절은 그 친구와 함께한 시절로 축약되었다. 그 애를 빼놓고서는 나의 학창 시절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애는 둥그런 이마에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가졌고 도톰한 입술에 테가 얇은 동그란 안경을 쓰고 웃을 땐 꼭 새우눈이 되었다.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을 좋아했다. 불행을 한 움큼 가지고도 그 애의 웃음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와 나는 학창 시절 동안 2번의 교환일기를 썼다.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오랜만에 들쳐본 교환 일기장엔 IMF, 가난, 공부, 남자 친구, 꿈, 고민, 눈물, 아빠 이런 단어들이 등장했고, 그날의 일기를 마치는 끄트머리에는 꼭 사랑한다는 고백이 쓰여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게 의지했는지, 서로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서운함 감정을 가지고 몇 번의 토라짐을 반복했는지 쓰여있었다. 서운했던 것을 적고 나면 그래도 나는 너뿐이라고, 너도 그렇지 않냐고 꼭 물었다. 25년 전의 학창 시절을 들춰보며 나는 우리가 얼마나 순수하게 착했는지를 보았다. 결코 착해질 수 없는 환경 안에서 깊은 좌절을 겪으면서도 '나쁜 짓'을 하지 말자고 꾹꾹 써 내려간 글씨를 보며 히죽거리다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두터운 일기장 첫머리에는 그는 나를 향해 이렇게 적었다. 


'수진아! 갑자기 니 이름이 부르고 싶어서. 사랑하는 수진아. 언제까지나 우리 우정 간직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힘든 일이나 괴로운 일,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 있으면 찾아와. 항상 내 마음은 열려 있으니깐'


어떤 위로는 명확한 모양과 실체 없이도 위로가 된다.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꽉 찬 위로가 되는 것. 그 시절 그는 내게 그런 친구였다. 


그 친구에 대해 예전에 적어 놓았던 글에 나는 이렇게 적었었다. '서로의 불행을 알아보았다'  

일기장에는 내 불행을 알리는 그 어떤 단어도 마음도 적지 않았다. 그저 늦은 귀가에 아빠에게 혼난 이야기, 엄마의 잔소리를 간략히 적었을 뿐이었다. 어른이라고 불리는 나이에 함께 섰을 때 그는 나에게 그것이 못내 서운했다고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단짝에게조차 하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엔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해도 되는 것인지 망설인 시간이 더 많아서였다. 커서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고, 해결할 수도 없는 일에 대해서 친구에게 내 불행을 전이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만 참아내면 그뿐이라고, 그건 온전히 내 몫이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되고, 불행을 나누면 반이 된다!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더 이상 순수하지 않은 어른이 되자, 그 말에 더 확신이 없었다. 타인이 불행을 보며 내일이 아니라는 다행스러운 안도. 행복은 나누지 않고 세어 나갈까 더 꽉 움켜쥐기 바빴을 테니까. 타인의 행복에 질투를 느끼고, 타인의 불행은 내 삶 앞에서 금방 잊히는 거였다. 사람들은 불행에 대한 위로는 쉽게 했고, 행복에 더 크게 기뻐하는 것은 어려워했다. 나는 그것이 꼭 나쁘다고 생각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 일지도 몰랐다. 그저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면 되는 거였다.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 꼭 서로의 곁을 지켰던 우리였다. 산다는 건, 늘 예상치 못한 갈등을 맞닥뜨리는 것이었고, 종종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것이었고,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주어진 일을 바득바득 해 나가며 카드값을 내고 생활 유지비를 꼬박꼬박 정산하고 인간관계의 고민을 안고 저울질하며 체면을 차려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권태롭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나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견디고 버티다 보니 세월은 덧없이 흘러 있었다. 


같은 교복을 6년 동안 입고, 일기를 쓰고, 불행을 이고 나쁜 짓 하지 말자던 우리는 서로가 꾸린 가정에서 살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매일 교실에서 보던 얼굴은 포개지는 삶 앞에 점점 잊혀 갔고, 한 달 동안 살며 쓰고 일궈낸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결제하고 마무리하는데 온 힘을 집중했다. 우리는 각자 그렇게 살았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무엇이든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가 무엇을 해왔고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지 세세한 모양을 확신하긴 어려워도 나는 짐작했다.  


연말이 좋은 딱 하나는 보고 싶은 이의 얼굴을 떠올리고 미뤄두었던 만남을 성사시키는 데 있었다. 우리는 연말에 만났었다. 그는 모든 마음들을 정리 한채, 모든 사건을 그 하나의 사건쯤으로 응집한 채, 고통스러웠을 감정들을 모두 몰아내고 이성만을 남겨 놓은 채 평소의 얼굴로 나를 만났다. 감정을 빼고 과거가 된 사건을 또박또박 이야기하다가도 그날의 분노가 일면 목소리가 떨렸고, 메마른 눈물이 볼에서 흘렀다. 나는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고, 도대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일어난 일을 머릿속에서 이해하느라 바빴다.  왜 그가 그 힘든 일을 겪었을 때 나는 몰랐나, 그는 왜 내게 연락하지 않았을까 얼굴이 화끈했다. 내가 친구에게 그런 친구가 아니라서 미안함에 눈물이 올랐다가, 그가 지금 내뱉은 과거형의 불행들이 가슴에 하나하나 꽂히느라 울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그는 자신의 일터에서 만난 언니 이야기를 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일을 겪은 그 언니가 자신의 일을 제일 먼저 안 사람이라고 했다. 많은 것을 나누고 공유하고 서로 위로했을 테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현실적인 조언을 하고 공감하는 불행이 서로에게 힘이 되었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모양의 불행은 형체가 있는 위로라서 다른 모양의 위로 보다 더 설득력이 강했다. 그래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불행을 맞닥뜨렸을 때 제일 먼저 초록창을 구글 창을 찾는 게 아닐까. 25년을 함께 우정을 쌓은 나의 위로보다는 그 언니의 위로가 더 도움과 힘이 되었을 거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나와 같은 사람이 많다는 동질감, 나와 같은 불행을 안고도 전진하는 삶들을 통해 또, 하루치의 살아갈 이유를 얻는 것이다. 알고 지낸 세월과 시간, 공유한 삶과는 별개의 위로였다. 엄마에 대한 내 글을 읽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작가님이 써 놓은 댓글이 누구의 위로보다 더 크게 다가올 수 있는 이유였다. 공감을 일으키는 비슷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최선을 다해  이해해 보고자 하는 위로의 말보다 더 빠르고 깊숙하게 다가와 마음에 남았다. 인간은 그렇게나 스스로 불행을 견딜 수 없는 연약한 존재였다.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건, 나라는 존재가 그저 위로가 되는 것. 그건 10대부터 앞으로의 얼굴도 기억할 '친구' 만이 할 수 있는 위로 이기도 했다. 그의 불행에 알은척하지 않고 가끔씩 전화를 해 너무 보고 싶다는 애정 어린 진심을 전하고 나는 여전히 네 옆에 있는 '친구'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변함없는 사실이라는 든든함으로 함께하자는 것이었다. 똑 단발을 하고 서로 웃으며 알아보았던 그 시절의 너의 말을 빌려 지금의 너에게 내가 전하면 그뿐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위로였다. 


'00아! 갑자기 니 이름이 부르고 싶어서. 사랑하는 00아. 언제까지나 우리 우정 간직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힘든 일이나 괴로운 일,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 있으면 찾아와. 항상 내 마음은 열려 있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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