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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Jan 07. 2022

여전히 모르겠어서, 그냥 살아요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을 읽으며

양다솔 작가의 신작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을 읽고 있다. 서너 권의 책을 번갈아 가며 읽고 있는데 좀처럼 이 책은 덮을 수가 없었다. 읽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다가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동시에  이렇게 읽힐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을 했다.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불행을 읽을 땐 너무 놀라서 책을 덮었다. 좀처럼 잘 떠올릴 일이 없는 아빠를 생각나게 한 책이었다. 옆에 있었지만 옆에 있었다고 할 수 없는 아빠를 떠올리게 했다. 가장 인상 깊게 여겼던 부분은 세 가족이 작은 찻상에 모여 보이차를 마시며 전투에 가까운 수다를 떠는 장면이었다. 몇 번씩 등장하는 그 부분을 읽을 때... 소설처럼 장면이 떠올랐으며... 2년 전 내가 아빠에게 가진 감정이 무엇일까 고민 끝에 내렸던 결론이 생각났다. 그 감정은 애석하게도 '불편'이라는 감정이었다. 살갗에 느껴져 퍼지는 느낌이 아니라 아빠라는 정보를 뇌에 입력하면 곧장 인식되는 감정 같은 거였다. 


매일 아침 밥상머리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양 발목을 잡힌 채 뱅뱅 돌아가는 게 어떤 느낌의 행복인지 궁금했다. 하교 후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일상적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다정한 아빠라는 게 어떤 건지 나는 몰랐다. 아빠랑 제일 좋았던 때가 언제예요? 누군가 물어 왔었다. 순간 당황한 채 동공이 커졌었다. 그것이 제일 좋았던 때라고 할 수 있는지 확신 없이, 고 3 때 입시장까지 태워다 주었던 때라고 꾸역꾸역 답하고는 뻘쭘해졌다. 양볼을 세게 잡아 흔들며 아이고 예쁜 우리 딸, 이라고 말하는 아빠들의 표정을 나는 모른다. 과연 그 순간의 기분은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른다. 


아빠와의 에피소드를 줄줄줄 읽어 내려가며... 행복한 기억이라고 떠올 릴 수 있는 게 나에겐 무엇이 있나-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다는 사실을 다신 한 번 덤덤히 확인했다. 결혼하고서는 쌍둥이를 봐주고, 과자를 사주고는 했다. 내 생일엔 회를 사주고 소주를 마시며 회복한 부녀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소소한 추억거리를 주지 않은 아빠라도 자신의 할 도리를 하고 엄마와 무탈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평범한 일상을 두고 엄마와 나, 동생을 또 한 번 배신한 날,  세월의 흔적이 흐른 얼굴이 아니라 고생과 슬픔과 상처가 박힌 얼굴에서 말로도 다 못 할 엄마의 고통을 본 날 나는 아빠에게 전화해 지하 주차장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후 내 폰에서 아빠의 번호를 지우고는 세상에 혼자 남겨진 사람처럼 울었다. 너무나 슬프고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이일을 두고, 누군가 내 어깨를 붙들고 "수진아 이렇게 해봐,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하고, 그렇게 해" '정답'을 알려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를 용서할 수 없다고, 굳게 다짐했던 마음엔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그저 가끔은 묻고 싶다. 검은 머리보다 하얀 머리가 많아진 아빠에게 너는 어떤 사람이냐고. 무엇을 위해 살았냐고. 어떤 꿈이 있었고, 무엇이 되고자 했냐고. 그도 아니라면 어떻게 살고 싶었냐고. 당신의 가장 좋은 때는 언제였냐고. 아빠를 이해해 보고자 노력했던 때도 있었다. 7남 2녀 중 8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난 아빠는 아마도 어떤 차례가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렸을 테고, 어떤 차례는 아예 오지 않은 상실을 격기도 했겠지. 어린 나를 키웠던 할머니는 허리가 굽어진 채 우리 집에서 지낼 때도 늘 큰아빠 이야기만 했다. 큰아들 큰아들.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 사랑도 줄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번번이 좌절했다. 그보다 잔인한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다. 아빠는 내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않았다. "수진아" 하고 다정하게.  


잊을 수 없는 상처쯤은 어찌어찌 감출 수 있었으나, '사랑' 받고 자라지 못한 흔적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이상하리 만큼 다른 사람에게 보였다. 관계 안에서 휘청대며 사랑받고 싶어 발버둥 치며 내 앞에 놓인 가느다란 실들을 꽉 잡고 치열하게 살아오고 건너왔다. 하나님과 남편과 친구가 없었으면 건너오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시간이 고맙고 삶이란 게 또 고마운 게 망각되고 소실되는 하루가 하루가 지나간다는 거였다. 빈자리는 다른 무엇으로도 채워진다는 사실이었고, 상처는 아프지만 마음은 무한히 회복될 수 있으며 오늘이 내일의 추억으로 살아진다는 거였다. 


내게 가족은 '아픈' 피붙이다. 상처가 터벅터벅 걸어 다니다가 내게로 걸어오는 거 같아서 아프다. 아파서 짜증부터 내고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지기도 한다. 아프니까 가라고 오지 말라고 할 수 없는 나의 존재들이었다. 가족이란 그런 거였다. 아픈 돌들이라 만나면 부딪히다 상처가 났다. 그러지 않으려면 나는 더 많이 낮아져야 하고, 내려놓아야 하고, 인내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정말이지 너무너무 힘들지만 노력해야 했다. 너무 뻔한 사실이지만, 내가 변해야 했다. 


이런 마음으로 살다가, 여전히 어렵고 모르겠기도 해도 그냥 살아가는 날을 마주한다. 






남편에게 물었다. 

"이 작가가 더 불행했을까? 내가 더 불행했을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와 일맥상통하는 질문이라 우리 둘은 그저 웃었다. 


나는 지금 차가운 바람을 맞고 따뜻한 바람을 안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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