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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Dec 31. 2021

겨울의 냄새

요즘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겨울의 냄새가 진득하게 몰려온다.

잊고 있었다는 듯... 겨울이지, 겨울. 머릿속으로 되뇐다.

화려하지도 않고 상쾌하지도, 생생함도 없는 겨울.

종일 잠들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겨울.

이불속의 안락함을 떨쳐내기 위해 자신과의 싸움이 다른 계절보다 힘이 든 때.

목까지 지퍼를 올리고 털부츠를 신고 나섰다.

단단히 감싸도 냄새는 결국 코끝으로 흘러들어왔다.


방학이 있었고, 졸업이 있었다.

노란 장미와 하얀 카네이션이 조화롭게 피어있는 다발을 들고 학교로 향했다.

꽃을 들었을 뿐인데 마음이 짧은 순간 봄처럼 해사해졌다.

꽃을 사면 밝은 기운과 어두운 기운을 동시에 느꼈다.

생이 짧은 꽃을 보고 있으면,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인다.

겨울 틈으로 끼어든 색깔이 나이 지긋한 할머니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어떤 말들은 생각하기도 전에 마음으로 튀어나온다.

고개가 꺾이도록 내 품의 노란 꽃에 눈을 붙박인 할머니의 외마디.

눈으로 말하는 눈의 모양... 예쁘다.

지나가는 이의 발걸음을 붙드는 생동한 아름다움.

나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꼭 꽃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방학식을 한 아이가 멀리서 보인다.

급한 마음에 아이의 가방을 열었다.

역시 보낸 선물이 주인에게 가지 못하고 무안하게 들어 있었다.

"엄마, 선생님이 선물을 받으면 선생님 할 수 없데"

"선생님이 편지만 받겠데"

'새봉 많이 받으세요' 적힌 편지는 무사히 주인에게 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새봉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은 아이의 글씨엔 평범한 삶의 안도가 묻어 있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부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을 때 나는 아득해졌다.

한 해가 고작 이틀도 남지 않은 게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걸...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 한담.

이 겨울을 묵묵히 견디면 숨 막히게 아름다울 '봄'이 오고 봄의 기대만을 안기엔 하루하루가 지는 게 너무 애틋하고, 슬프다고 아이에게 어떻게 말한담.

그저 바람을 맞으며 터벅터벅 걸을 뿐이었다.

아이는 연신 실내화 가방을 뱅뱅 돌리며 겨울이 춥지 않다고 했다.

그래, 넌 방금 핀 꽃이구나.


따뜻한 거피가 입안에서 돌고, 시린 손을 녹였다.

겨울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겨울의 냄새가 났다.

한 해를 마무리하려는 차분하면서도 불안한 몸짓의 냄새.

이맘때쯤 찾아오는 끝과 시작을 알리는 들뜸의 냄새.

마침의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하는 자의 탄식의 냄새.

평범함이 꿈이 되어버리고 만 상실의 냄새.


시작과 끝 앞에 놓인 이들의 식탁엔 짜장면과 꽃다발이 놓여 있었고,

순간 음식 냄새가 아닌 겨울의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검은색 차림으로 검은 면을 연신 입으로 가져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생경해 눈을 급하게 돌리고

왜인지 자꾸 마음이 쓸쓸해지려고 했고, 눈물이 솟구치려고 해서 짜장면 양념에 비벼놓은 흰밥을 입속으로 크게 넣어 꾹꾹 씹었다.  

맛있지? 아이에게 물어가며.

노란 단무지가 개운했다.


자꾸 계절이 가고, 나이를 먹는 게 서글퍼졌다.

오늘이 내일 앞에 맥없이 멀어지는 게 싫었다.

어떤 기대들을 붙잡고 살아야 할지 또, 모르기도 해서.

자꾸 지나온 과거들이 주마등처럼 스쳤고

왜 그 과거들과 시원스럽게 작별하지 못하는지 답할 수 없었다.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 때문에 그렇다고 둘러대며

살아있는 것들에만 눈을 돌리기엔  

자꾸 눈에 밟히는 생들이 슬펐다고 투정하며

코끝으로 흘러 들어온 냄새가 싫다고 틀어막을 수 없었다.


후각으로 느끼고 온 몸으로 퍼지는 겨울의 냄새들.이었다.

아스라이 살아질 냄새니 실컷 맡다 흘려보내기로 했다.


결코 잡히질 않을 한 시절이 또 흐른다.


안녕, 2021

안녕,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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