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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Jan 26. 2022

다시 쓰게 될 가족

비극을 끝내고 싶어서 

자신의 침대에서 친구와 뒹구는 남편을 본 여자는 그날로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를 데리고 죽을 결심을 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자신의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따라간 딸아이는 그날 밤 엄마가 건넨, 요구르트를 내내 가슴에 묻고 산다. 37살이 된 지금도 자신의 인생을 주무르고 사사건건 간섭하고 참견하는 엄마가 못내 밉다. 사랑하는 남자가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이 되고 첫사랑 선배가 하필이면 유부남이다.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못하는 둘 사이에서 위태로운 딸에게 엄마는 세상 모든 남자, 누구든 만나도 되지만 장애인, 유부남 두 부류는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는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인생은 퍽 괜찮아 보였다. 긁으면 피가 솟구칠 거 같은 기억은 좀처럼 잘 잊히지 않고 삶 곳곳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고 엄마와의 갈등은 비극을 향해 나아가는 거 같았다. 기억은 정말 느닷없는 것이라서 삽시간에 우울과 비통함을 데려왔다. 딸은 숙취가 가라앉은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마침 농약이 든 요구르트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엄마 거야, 나를 죽이려고 했어- 살기 어린 말은 엄마의 가슴을 향해 그대로 내리 꽂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것도 있는 법이었다.


서너 번을 본 드라마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나는 매번 완이가 되었었다.


엄마, 아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다. 두 사람 앞에 서면 어쩐지 태초에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되어 버리곤 했다. 지나간 일을 뭐하러 짚나 싶어, 하고 싶었던 말들을 삼켰다. 다정한 딸은 고사하고 조금 살가운 딸이 되고 싶기도 했다. 살갑고 다정한 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기도 하고 막상 하려고 하면 소름이 돋아 어정쩡한 모습으로 무뚝뚝해졌다. '남'들에게 하는 것처럼만 해도 반은 성공이겠네. 스스로를 타박해도 몸이 마음과 다르게 돌처럼 굳었다. 불행을 떠올리게 하는 수많은 기억들은 자잘한 기쁨 앞에 그 흔적이 점점 옅어졌다. 웃음 뒤에 감춰둔 사람들의 슬픔과 아픔들이 보였고, 극복하는 발과 손들에게서 희망을 보기도 했으니까. 아빠는 유독 아들을 예뻐했다. 좀처럼 머물지 않은 마음이 아들에게 머물러 다행이다 싶었다. 아빠가 예뻐할 수 있는 아들을 낳아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천진한 아들은 아빠를 '외할아버지' 그 자체로만 보았으니까. 내게 주지 못한 눈빛을 아들에게 보여서 나는 내심 기뻤다. 그 눈빛으로 엄마를, 나를, 동생에게도 머물기를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남은 인생엔 어떤 기억도 끌어오지 않고 여느 가족처럼 지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또 한 번 가족을 저버린 아빠의 실수 앞에 엄마와 나, 동생은 각자의 방식대로 온전히 슬퍼했다. 나는 오랫동안 내 몸을 더듬던 손이 아빠가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작년 여름부터 꾸물꾸물 올라온 끔찍한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헤어 나올 수 없어 어느 날, 밤엔 그만 11층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내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무서워지기 시작해... 식물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잠든- 삶의 밤 한가운데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짧은 순간- 내 마음이 도둑질당하지 않도록 하는 묘약이 필요했다. 묘약은 탁월했다. 초록의 여린 잎들을 보고 있으면 돌연, 마음이 차분해지고 눈길과 손길이 여린 잎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물을 주고 볕을 보여주고 물 샤워를 해주고 나면 새 잎이 돋아났다. 한 개, 두 개, 세 개... 흐릿해지는 의식을 또렷이 하고 식물을 보게 되었다.


지난 주말 술자리가 있었다. 자리를 끝내고 계획도 없이 부모님 집을 찾았고, 아빠의 말투에 속이 상한 나는 정확히 30년 세월의 묵혀둔 이야기를 한꺼번에 토하듯 게워 냈다. 당신의 잘못과 지난 상처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고, 화가 찬 울분과 기막힌 슬픔과 끔찍한 억울함이 담긴 10대의 내 애틋한 인생을 아빠의 얼굴에 데고 퍼부었다. 기다렸다는 듯 아빠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을 땐 악이 받친 소리가 물러가고 참혹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되묻는 그에게 끝까지 지독히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 입에서 흘러나오던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내 귀로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지독히도 지독스러웠다. 당혹스러움이 깔린 아빠의 얼굴과 하얗게 질린 엄마의 얼굴을 뒤로하고 현관문을 열고 나왔고 처참했던 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났다.  


기약 없이 야밤에 찾아가 부모를 향해 미친 듯 고함을 쳐대는 딸을 본 엄마는 다음 날, 수화기 너머로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엄마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 깜깜했다. 하고 싶었던 말을 했고, 내내 괴롭히던 답을 찾았고, 아빠도 자신의 잘못을 알아야지. 확고한 마음으로 엄마의 우는 얼굴을 지울 수가 없다. 막연히 엄마를 기쁘게 하는 딸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마흔이 되어서도 번번이 실패를 선택하고 실패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본다. 침대에서 모로 누워 울음을 지그시 눌렀다. 울 자격을 상실한 듯.  


현재를 열심히 살아냈다고 생각했다. 몸이 현재를 벗어날 수 없으니 그저 살았을 뿐이었다. 마음과 정신은 과거를 부유할 때가 많았고, 끝끝내 잊히지 않는 과거를 한 자락 끌고 와 우울이 스민 얼굴로 현재를 못 이기는 척, 행복한 척 살았다. 감사해야 할 것들이 많은 일상임에도 마음을 구기고 울상인 얼굴을 향해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위로가 닿기를 바랐다. 든든한 버팀목을 두고도 사소하고도 사사로운 말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지고 가볍게 넘기지 못해 굴을 파고 들어가 사랑하는 이들을 오래 기다리게 했다. 상처라 불리는 기억을 가슴 한편에 몰아넣고 이따금씩 들어가 꺼내고는 아파하고 불행해하고 억울해하는 일을 반복했다. 


엄마가 긴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유서 같았던 문장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당장 통화 버튼을 누르고 목소리를 확인하고서야 통화를 마쳤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우리 네식 구만 보자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을 전해보자고 마음먹고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결혼 전에도 넷이서 모여 본 적 없는 우리 가족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하루아침으로 마음이 오고 가고 변하는 심정을 맛보고 있다. 해야 해. 할 수 있어. 마음먹다가도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싸늘한 표정이 떠오르면 공포를 들키지 않게 날을 세울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해야 한다고 되뇌며 이부자리에 든다.  


우리, 이제 그만 불행하고 남은 시간을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하는데 쓰지 말자고. 행복해지자고 행복한 길로 들어서고 가족이라는 실체를 실현시키며 살자고. 다른 사람도 아닌 가장 끈끈한 우리의 관계를 가장 먼 관계로 만드는 것을 멈추고 가장 가까운 관계로 돌이켜 보자고. 노력해 보자고. 부모님의 큰 딸로 태어났으니 나부터 달라져 보겠다고 내 삶에 위로가 되어주고 제일 첫째줄에 놓인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달라고. 나도 당신들의 삶에 그런 존재이고 싶다고. 우리 서로의 인생에 그런 '가족'이 되어 보자고. 모른 척하고 익숙했던 무관심에 돌을 던지고 다른 누구도 아닌 서로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표현하고 살아 보자고.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애정 어린 말들을 지금부터 해보며 끈끈한 가족애를 누려보자고. 엄마를 더 이상 불행한 아내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아빠의 할 도리를 다 해 달라고. 나는 그거면 됐다고. 부족한 딸이지만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 보겠다고.  


불행한 기억을 더듬거리며 더 이상 울고 싶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을 기억을 잠잠히 인정하고 웃으며 따뜻하게 손을 흔들고 싶었다. 어두 침침한 방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를 곱씹어 보며... 나는 스스로 불행하기를 자처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처가 그득한 방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걷어내고 말끔하게 청소를 하고 색이 무르익은 싱고디움 식물을 놓아두고 나왔다. 버려두지 않기로 하고 그때의 나를 애정하고 슬픔에 겨워하지 않고 기쁨의 겨운 내가 나를 안아줄 수 있기를 바랐다. 


'괜찮아' 이 한마디는 흔하면서도 굉장히 어려웠다.

진심으로 "괜찮아"하고 답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마음과 달리 의례 괜찮아, 했던 적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었을 테니. 괜찮지 않았던 시절과 진정으로 헤어지고 진실로 괜찮아지고 싶어서 나는 지금 무던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길고 긴 겨울이 햇살에 녹아내리고 한사코 봄은 오니 나는 나의 가족에게 당도할 한껏 아름다울 봄을 위해 지금 계절을 아쉬움과 후회 없이 '안녕' 하기로 한다. 




큰 딸 너 태어날 때는 너무 가난하고 살기가 힘들어서 잘해 주지도 못하고 사랑으로 키우지 못했는지 지금 생각하니 아픈 마음을 후회해도 소용이 없구나 딸아 이 못난 엄마가 어떻게 해야 딸 아픈 상처가 치유될까 이 엄마는 마음이 힘들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딸아 이제는 너도 두 아이의 엄마고 하니까 지난날에 아픈 기억들이 남아 있다면 다 잊어버리고 둥이들 예쁘고 훌륭한 아이로 키우고 이다음에 둥이들한테 사랑받고 좋은 엄마가 되길 바란다. 상처가 많은 큰 딸아 못난 엄마가 미안하고 사랑한다


나도 엄마, 엄마 내 마음 편하자고 엄마 마음에 비수를 꽂아서 내가 정말 미안해. 철없는 딸이라 미안하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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