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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Feb 07. 2022

빛바랜 사진이 전하는

기억에 없는 작은 행복이 당신에게도 반드시 있다는 믿음

굵은 모발에 턱선까지 오는 단발머리 젊은 엄마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봤다. 샛 노란색 저고리와, 다홍색 한복 치마를 곱게 입고 연한 분홍색으로 칠해진 입술의 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다. 오른손에는 각을 잡아 포장한 정사각형의 선물을 들고 어린 동생의 절을 받고 있는 사진 속의 엄마. 깜짝 놀랄 만큼 예쁘기도 하고 '나'라고 해도 믿을 만큼 내가 엄마와 닮아 있어 사진을 한참 들여다 보고는 쓱 집으로 가져왔다. 엄마 딸이니 엄마를 닮는 게 당연하지만, 오랜만에 꺼내 본 빛바랜 사진 속 엄마의 모습에서 나는 쌍둥이처럼 꼭 엄마를 닮아 있었다. 1992년도라고 찍힌 사진 속 엄마는 전혀 촌스럽지도 않고 세련되고 예뻐 우리 엄마 정말 예뻤구나, 연신 감탄했다.  




부모님과 동생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아이들을 챙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나섰다. 한 층에 6가구가 사는 긴 복도식 아파트의 세 번째 현관문을 두드렸다. 어제 보다 더 늙어 버린 듯한 엄마가 문을 열었다. 먼저 와 있는 동생은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와서 속이 좋지 않다며 누워 있다. 방금 만들어 접시에  나란히 놓인 통통한 꼬막을 하나씩 발라 먹으며 아빠가 자리하지 않은 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윤기가 흐르고 양념이 알맞게 베고 고르게 버무려진 잡채를 배부르게 먹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중간중간 지난밤 일을 툭툭 뱉어냈다. 나는 잘못을 인정했고, 엄만 아빠에게 지난 세월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먼 아득한 시절을 되돌아보며 아빠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되짚어 보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고 했다. 그러니 너는 아무 걱정 말라고. 


엄마는 가족이니까 서로 화도 내는 거라고 했지만 나는 이제 제발 그러지 말자고, 서로에게 더 많이 웃어 보이자는 말을 힘겹게 했다. 나는 엄마의 표정과 말이 소리가 되어 나오기 전 얼굴에 미묘하게 스치는 차가운 표정과 말투를 포착해서 재빠르게 방어하는데 탁월했다. 더 신경질을 내고, 더 불쾌한 목소리로 엄마의 말 허리를 잘랐다. 불행한 삶들이 포개진 것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조악한 모습들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내 마음밭이 크고 넓고 넉넉해지면 엄마의 그런 모습조차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왕 같은 완악한 내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동생은 여전히 누워 있었고, 엄마와 나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는 말들을 드문드문 늘어놓았지만 어느 누구도 정갈한 마음으로 말들을 말끔히 정리하지 않았고 그저 듣고는 흘려보냈다. 언젠가 모두가 당도할 죽음의 문턱 앞에 우리 모두 때늦은 한탄과 후회 없이 헤어질 수 있기를 바랐다. 부모의 불행을 잇는 자식이 되지는 말자고 마음먹고 친정으로 향했었다. 내가 엄마의 인생에 쉼과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드문 드문 주고받는 대화 틈으로 엄마의 핸드폰이 울렸다. 자리를 비운 아빠였다. 

평범하고 여느 부부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엄마의 목소리와 아빠의 말투와 억양이 핸드폰으로 흘러나온다. 

엄마는 늘 그랬다. 반복되는 불행을 겪으며 곧 죽을 것처럼 슬픔에 겨워 울다가도 벌떡 일어나 저벅저벅 걸었다.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대체 엄마는 왜 아빠와 사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어딘가로 나갔다 돌아오는 아빠와 어김없이 다시 살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주고받고 농담을 하고는 웃기까지 했다. 엄마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쉽게 돌아가 있었다. 늘 내가 보던 모습으로. 마침 나는 그 연유를 묻기로 결심했다. 


"엄마,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아빠와 아무렇지 않은 듯 살 수 있었어?"


순간, 엄마의 미간이 살짝 접히고 표정이 어두워지고 싸늘하게 돌변하려고 해... 화나서 묻는 거 아니고 그냥 엄마가 너무 대단하다는('대단'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는지 묻는 거야,라고 다시 고쳐 질문했다. 


"니들 때문에 살았어" 


짐작했던 대답이 나왔고, 엄마는 덧붙였다. "니 아빠는 엄마를 믿었던 거 같아. 자신이 아무리 사고를 쳐도 엄마가 '자리'에 있을 사람이라는 걸 알고 마음대로 하며 살았던 더 거 같아" 엄마는 심심하면 뉴스에 나오는 자식을 버린 부모들 앞에서 분노하고 욕을 하고 비난하며 슬퍼했다. 배가 아파서 인지 내내 말이 없던 동생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엄마 나는 자식 때문에 참고 사는 엄마는 되지 않을 거야. 그것은 애한테도 안 좋은 거니까" 아빠 손 잡고 예식장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도 했다. 


어느 쪽으로든 완벽히 손을 들 수 없는 양갈래의 인생길 위에 나도 동생의 말에 힘을 실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 더 나은 쪽으로 가고자 했을 것이고 어쩔 땐 분간조차 하지 못하고 휩쓸리듯 건너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른 선택에 곁눈질하지 않고 흉내 낼 수 없는 묵묵함으로 자리를 지킨 슬픈 생의 엄마 아빠들이 있다는 거였다. 어떤 모양이든 모습이든 '자식'을 지킨 부모들이 있었다.  


말을 멈춘 엄마가 식탁 의자에서 대뜸 일어나 고급 양주들이 놓여 있는 작은 서랍장을 열어 미처 앨범에 끼우지 못한 사진들을 우르르 꺼냈다. 사진은 우후죽순 크기가 모두 달랐고, 30년이 지났어도 쨍한 색상을 유지한 사진이 있는가 하면 보릿고개 시절을 떠 올 리게 할 만한 아주 오래된 사진도 있었다. 갑자기 웬 사진들을 꺼내는 거야, 퉁명스러운 말투완 달리 눈은 반짝거리고 사진을 더듬는 손길은 호기심을 뚝뚝 흘리며 분주했다. 

풍성한 머리숱에 알이 큰 선글라스를 낀 늘씬한 팔다리가 돋보이는 엄마가 반가웠다. 시대상이 반영하는 촌스러움을 떠올릴 수 없는 엄마는 단연 미인이었다. 20대의 젊은 아빠는 그야말로 나팔바지를 입고 조끼를 걸치고 동네 골목을 휩쓸고 다녔을 만한 폼으로 카메라를 향해 쳐다보고 있었다. "날라리네 날라리" 동생의 진담이 섞인 농담이 들려왔다. 엄마가 꺼내는 사진 한 장 한 장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보기 시작했다. 다 기억하지 못하는 짧은 순간이 직사각형의 빛바랜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기록하지 않고 찍어 놓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십상인 일상의 단락들이었다. 


사진은 6학년 부채춤, 중학교 시절을 빼고는 내가 기억하지 못한 '좋은' 나날을 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예쁜 구두도 신고 있었고, 뽈록 나온 배가 드러나는 원피스에 흰 스타킹도 신었다. 양갈래도 묶어 땋아 내린 머리에서는 엄마의 손길이 묻어 있었고, 발목까지 오는 시냇가에 아기 동생을 안고 있는 얼굴은 천진했다. 따뜻한 봄바람이 방금 지나갔을 법한 사진 속엔 푸른 잔디가 보였고 잔디 위로는 아빠와 어린 동생과 내가 편안한 미소로 다정하게 앉아 있었다. 한 수돗가를 중심으로 다 가구가 모여 살았던 집에서 찍은 사진엔 얼굴도 잊어버린 친구들이 찍혀 있었다. 엄마가 이름을 나열했다. 잊고 있었던 이름들이 반가웠고 그들의 안부를 묻고 다 자란 모습을 상상하다 낄낄거렸다. "나 여기 푸세식 똥통에 다리 하나 빠졌을 때 엄마 뭐했어?" 엄마는 말없이 웃었다. "언니, 그래서 어떻게 했어?" "기억 안 나, 빠진 것만 기억나" 우린 웃었다. 뭐했겠어. 수돗가에서 울며 씻었겠지. 사진 속 친구들의 놀림을 받으며.  


우스꽝스러운 어린 동생의 포즈에 모두가 웃고, 유치원 원복을 입고 양쪽으로 남자 친구와 어깨동무를 한 채 찍힌 사진을 보며 갑자기 어깨가 으쓱해졌다. 유치원 땐 왕따는 아니었나 보군, 중얼거리자... 언니 왕따였어? 동생이 물어 왔다. 몰라, 학창 시절에 한 번은 있지 않았을까. 친구들이 나는 왕따였어도 몰랐을 거라고 하더라, 집에 혼자 간다고 하고... 아무튼 이상했데. 동생은 그것도 위로라는 듯 무심히 뱉어냈다. 

돌이 지난 무렵에 찍힌 듯한 사진을 오래도록 봤다. 아기인 '나'는 아들과 닮아 있었다. 직모의 머리칼이 웃자란 듯 눈썹을 덮고 삐죽거렸다. 40년이 지난 사진은 노래져 꼬깃 했지만 나는 무슨 유물이라도 되는냥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러 닦고는 가방에 넣었다. 사진을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를 향해 엄마는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봐봐. 이렇게 좋은 유치원도 다니고, 돌 상도 차려주고, 피아노 학원도 다니고... 아빠랑 사진도 찍고 놀러도 갔었네~ 남들 다 하는 거 다 해줬어"


스스로에게 하는 위안처럼 들리기도 해, 나는 잠시 마음이 먹먹해졌다. 내가 바란 최선의 모양이 아녔어도 엄만 정말 최선을 다했을 거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유독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을 보니, 엄마의 지난 세월을 불행했다고만 말하고 싶지 않아 졌다. 불행만을 떠올리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미소여서. 그 환한 미소를 짓게 한 작은 행복이 엄마를 다시 살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곱게 땋은 양갈래 머리, 동생 앞에서 짓는 환한 미소에서 엄마를 살게 한 이유를 발견한 거 같아 마음이 꽉 차게 따뜻했다. 


정말 그랬다. 적어도 사진 속 우리 가족은 다정하고 행복했다. 왜 불행한 기억만 득실거리는지 알 수 없어 마음 한쪽이 늘 욱신 거렸는데... 수십 장의 사진 속에 찍힌 가족의 모습이 찡한 눈물이 올라올 만큼 위로가 되었다. 기억나지 않아도 분명하게 찍힌 행복했던 날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양손을 포개 잡고 터벅터벅 걸어갈 수 있을 거 같은 마음이 샘솟았다. 자리를 비운 아빠가 밉지 않았었다. 하늘이 무너질듯한 난리를 피우고 매 번 별다를 것 없이 대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차가운 분노가 이는 이질감을 느껴 왔는데... 오늘 휴대폰을 귀에 대고 툭툭 뱉어 내는 소리에서 더는 지긋지긋하지 않은.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가 밀려왔었다. 



보물찾기 하듯 숨겨진 행복을 모두 찾고는 동생과 나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구정에 만난 아빠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현관문 앞에서 겨우 인사를 했다. 

양 끄트머리 서서 엄마, 동생, 쌍둥이, 제부, 남편을 사이에 두고 마치 멀고도 가까운 사이처럼 팔을 뻗어 흔들었다. 

"아빠 새해 복 많이 받아"

"우리 이제 행복합시다" 

엄청 퉁명스럽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한. 

"응"이라고 작게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툭, 눈물이 올라올 거 같았는데 거기서 울면 너무 창피한 일이라 힘주어 참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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