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교사가 되기 위해.
***님은 **대학원 *번째 예비합격입니다.
휴직을 준비하면서 대학원을 갈 타이밍이 딱 지금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년, 하반기에 원서를 넣고 부랴부랴 면접 준비를 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자만을 했다. 떡, 하고 떨어지고 나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두 번째, 원서를 넣었고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받았다면 지금쯤 대학원생이 되었겠지만 또 한 번 떨어지고 나니, 떨어진 이유를 면밀히 분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면접을 마치고 시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본 거 같지도, 그렇다고 못 본 거 같지도 않아요. 확신이 없어요"
"그런데, 제가 대답을 잘한 걸까요?"
쪽지에 적혀 있는 이론을 답했고, 두 명의 교수님 중 한 분이 추가 질문을 했다.
후에, 상담교사가 된다면 어떤 상담교사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대답을 들은 교수님은 아니, 그게 아니라- 식으로 질문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듯 답답한 뉘앙스를 내게 보내왔다. 그런데 동시에 나도 답답했다. 어떤 답을 했어야 했을까. 자신 있게 대답하고 있던 나의 말 허리를 잘랐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어떻게든 말을 마무리 지으려 애썼다.
"아마도 교수는 네가 학업 후 상담교사로서 어떤 상담 철학을 가지고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지를 물었던 거 같아. 전문적인 상담교사로서 네가 얼마나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겠지"
청소년 전문 상담교사와 기독교 상담전문가로서 현장에서 10여 년을 근무하고 현재는 대학교 교수인 언니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전문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인간성'을 강조하는 답변을 했으니.
솔직히 말하면 그런 '전문성'은 대학원에서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대학원을 가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과 학업에 임하는 마음가짐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떨어진 이유가 분명해졌다.
'상담 심리'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내게 언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자꾸 무언가를 동경하는 모습이 있어서 안타까워"
언니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30평대 새 아파트에 살고, 이제 40대인 남편의 연봉은 꽤 높은 편인 데다(남편 말이 그래요), 나는 국공립어린이집 교사로 스스로 만족할 만한 급여를 받고 있으며, 예쁘고 잘생긴 두 아이와 가정적이고 다정다감한 남편을 두고 있는 것. 편안하게 하루를 살아도 되지 않냐고. 여기에 만족하고 살아도 되지 않냐고. 더불어 두 아이를 잘 돌보는 것도 네 일이지 않냐고. 돌려 말하면 그런 의도이기도 했다. 감사해야 하고 행복을 느끼기에 충분한 일임은 맞지만 '나'라는 사람의 절대적인 행복의 조건은 될 수 없었다. 스스로가 가치롭게 여겨지는 일, 나를 발현시킬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굳이 왜 가려는 지도 물었다.
나는 답했다.
"나를 알고 싶어서요. 나를 알아가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무엇이든 적당히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맹목적으로 매달려 목표한 것을 이루고,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보란 듯이 이기고, 치열한 접전 끝에 쟁취한 우선순위에 들고 싶은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퍼렇게 멍이 든 엄마의 얼굴을 지우고, 어릴 적 수치스러운 기억을 떠올리지 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인생이었다. 끔찍한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공부해서 무언가를 이루어 낸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은 결국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도 참 열심히 살아낸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뒤쪽으로 밀려나는 순위에 움츠려 들지 않으려면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적당한 선에서 자급자족하는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기준과 잣대에 휘둘리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며 이십 대를 보냈다. 그럼에도 숱하게 넘어졌고, 평가의 목전에서 버둥거렸다.
일등이 있으면 꼴등도 있는 법이잖아요? 이번엔 내가 물었다.
꼴등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덧붙였다.
언니는 뜻밖의 말을 했다.
"어나더 레벨의 사람들이 있어"
꼴등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절실함으로 무장한 채 포기를 모르고 죽을 각오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꾸준함으로 무언가를 일구는 사람들이 있다고. 교수 일을 하며 매 년 수십 장의 시험지와 과제물엔 단연 눈에 띄는 어나더 레벨이 있는데, 그런 학생에겐 A+이라는 점수도 모자란다고 엄지를 추켜 세웠다. 극명하게 갈리는 건 언제나 일등과 꼴등이고, 늘 어렵고 애매한 건 적당히 하는 학생들이라고 했다. 스스로만 만족하는 열심을 적당함으로 버무린 채 만족하는 사람들... 나였다.
숨통이 끊어질 듯한 노력 없이 선망하는 곳으로 오르려는 내가 이기적이라고도 했고, 나는 수긍했다. 환경 탓을 하려는 내게 매일 같이 음식물 쓰레기를 먹으라고 하고, 손등에 펄펄 끓는 물을 부은 아버지를 용서한 제자가 매일 같이 웃는다는 말에 그렁하게 차오른 눈물을 떨궜다.
부끄러웠다. 일등의 범접할 수 없는 노력의 대가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뒤틀린 마음밭에서 올라온 초라함 때문이었을 테다. 어차피 일등이 될 수 없다면 적당히 하고 초라해지지 말자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결론을 내놓았다. 그래야 적당한 선에서 열심히 할 수 있었고,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수월했다. 기필코 고통의 단맛을 취한 이들을 추앙하기보다 주목받지 못한 채 뒷 자락에 무리 지어 있는 사람들에게 더 눈길을 두고 싶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에 대한 변명이고 위로였다.
떨어졌다고 분통을 터트릴 일이 아닌, '합격'을 위해 긴 시간 준비하고, 빈틈없이 면접에 임한 사람들이 응당 받아야 할 결과였다고 인정한다. 이런저런 생각들은 모두 접어 두고, 왜 공부를 하는지 이 공부를 통해 네가 이루고 싶은 '소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는 언니의 마지막 말을 틈틈이 생각한다. 두 번이나 떨어지다니, 치기 어린 오기 말고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볼일이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혀 온 근본적인 문제에서 많이 '해방' 되었다고 생각했다. 기억은 정말 느닷없어서 별안간 올라오면 스스로를 잃을 정도로 이성을 앗아갔다. 나는 괜찮아 수없이 되뇌는 주문이 아닌, 내 안의 문제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똑바로 직시해 볼 필요가 있었고, 하나하나 면밀히 알아가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신과에 가면 분명 우울증, 불안장애, 기분부전 장애 등의 병명을 얻고 희고 고운 알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내 안의 아픈 나를 본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와 같지 않더라도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희망도 품어 보며 무엇보다 '희생'에 약한 내가 가족을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돌파구' 같은 심정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도 동시에 올라왔다. 역시나 여기에서도 실패를 예측하는 결과에 대한 글을 적어 버리고 만다.
봄이 왔고, 봄을 시기해 마지막 바람을 몰고 올 꽃샘추위가 지나면 4월이 한창일 것이다. 마지막일지 모를 원서를 한번 더 넣어 보고, 면접을 준비하며 5월을 보내기로 했다. 덤덤히 결과를 기다리면 내가 사랑하는 여름이 올 테다. 두려움과 불안을 멈추고 예측을 멈추고 적당히를 뛰어넘어 열심을 내보기로 한다. '합격'이라고 박힌 글자를 한 손에 쥐고 뜨거운 여름을 아주 뜨겁게 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