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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Dec 16. 2022

눈을 밟고 일어서서

내가 자주 '우울'에 빠졌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믿었던 사람들이 내뱉던 '말' 때문이었는데, 상처 주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무너질 때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나에게 돌아왔을 때였다. 나는 지나치게 모든 문제가 '나'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곤 했다. 삶에서 일어났던 갈등과 문제를 되짚어 보면 그 끝은 늘 내가 얼마나 머저리 같은지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밝혀 내는 일이었다. 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는데 나는 꼭 그런 절차를 밟았다. 탄탄하고 건강한 가정환경에서 자라지 못해서 허구한 날 그런 꼴이나 당한다고 나를 불쌍히 여기는 곳에서부터 시작해 부모님을 원망하는 지점을 향해 달려가다 자포자기한 채로 우울하기를 선택했다.(그래! 나는 '선택'이라는 단어를 골랐다!) 한결같은 과정을 20년째 반복하고 있다. 


두통에 시달리는 다툼으로 며칠 동안 같은 과정을 반복하던 스스로에게 별안간 욕을 내뱉었다. 미친년. 지겨웠다. 상관도 없는 일에 늘 부모님을 끌어들이고 여전히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스스로 불쌍히 여기는 코스프레를 멈추라고. 꼭 감정을 파는 사람 같았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단 한 명, 나. 감정은 부풀대로 부풀어 내가 사는 공간만큼 커져서 나를 삼키곤 한다.

 

현실 치료의 창시자인 Glasser가 말한 심리치료법 중에 눈여겨본 것이 있었다. '동사로 표현하기' 이는 다시 말하면 내담자로 하여금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인데, 예를 들자면 지금 내가 우울한 것은 내가 우울을 '선택' 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행동과 사고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우울'을 느끼니 우울하다고 말한 것인데, 우울을 선택했다고 하니 납득이 되질 않았다. 감정은 어디까지나 '느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느낌을 어떻게 선택해? 다른 관점에서 다시 보자면 '인간'은 내면의 힘을 가진 존재로 보고 스스로 얼마든지 '변화'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변화가 가능하다는 거다. 당신은 변화될 수 있다고 마법을 부리는 것.  

슬픈 일을 겪었으니 언제고 그 일을 꺼내면 나는 절로 슬퍼지겠지만, 내가 슬프지 않기로 선택한다면 슬프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사실 나는 지금 매우 우울하다. 내가 가진 성격적인 결함과 결핍이 자꾸 내 마음을 난도질하고 가족을 상처 입힌다고 생각하면 돌아버릴 거 같은데 도무지 제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는 거다. 


나를 꼬집는 부스러기들이 마음으로 떨어질 때, 흰 눈이 조금씩 쌓인다. 

흰 눈을 밟고 걷는다. 

족적이 찍히는 하얀 발자국을 바라봤다. 

희고 하얗다. 

하얀 마음에 새겨진 상처받은 말들이 선명히 올라온다. 

시리고 아린다. 


나는 대부분의 일들을 망각한 채 살지만 어떤 말들은 눈을 감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거 같아... 그런 마음을 어떻게 두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답답했다. 나를 무너뜨린 말은 하얗게 녹아 없어지고 다시 새하얀 눈이 떨어진 그곳에 다정한 말들만 받아 새기고 살고 싶지만 삶은 결코 그리 살아지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안다. 나를 상처 입힌 이들을 향해 분노를 품지 않고 그들 속에 잠긴 부족함을 가엽게 여기며 웃으며 돌아서고 싶은데, 나는 꼭 우는 얼굴을 들키고 만다. 잠잠히 고요하게 요동치 않고 싶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앞세워 네 잘못을 낱낱이 뱉고 너의 말에 휘둘리지 않은 채 단단한 마음을 갖고 싶었다. 원래 인생이 그렇지 않냐며 훌훌 털어 버리고 일어나서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살고 싶다. 적어도 나를 몇 번이고 삼키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엄치는 걸 멈추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거친 눈이 세차게 흩어지고 겨울나무 위에 쌓인 눈과 지면에 닿아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는 눈이 동시에 '눈' 속으로 들어온다.

결정체의 모습으로 녹아 없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을 봤다.

속절없이 왔다가 그렇게 짧은 순간 사라지는 감정

녹아 흘러 보내 버리면 그만인 것을 

무엇을 위해 그리 붙들고 사는지 싶었다 

자연엔 언제나 해답이 녹아 있다 


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설명하라고 하면 나는 기꺼이 기쁘게 '눈'을 향한 아름다운 단어들을 떠올릴 테다. 얼마나 많은 눈이 쌓일지, 상상이 되고 마는 출근 길이 어떠할지, 쌓인 눈으로 내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오늘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사람에 더 가깝다. 내가 사랑하는 나만의 감성은 불행한 순간에 더 크게 빛을 발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더 슬픈 노래를 찾아 들을 것. 슬픈 드라마를 보고 펑펑 울 것. 거듭거듭 우울의 길로 걸어 들어갈 것. 


빛나는 감성을 주로 슬플 때만 꺼내 쓰다 보니 나는 '감정적인' 눈사람이 되어있었다.  

감춰도 얼굴엔 우울이 녹아 있었다

웃음이 흘러도 우울이 스며 있었다

녹을 땐 녹더라도 튼튼한 눈사람이 되어 녹아버려야지

밟아도 밟히지 않는 눈을 밟고 일어선다


감정에만 매이길을 주저하는 사람이 되자고 눈을 밟고 걸었다. 슬픈 순간에 발화하듯 폭발하는 분노 앞에서도 '이성적인' 면을 주저 없이 꺼내 써보자고 눈을 밟고 걸었다. 복기하듯 슬픔을 꺼내 쓰는 버릇도 더 이상 그것이 나를 뒤흔들 수 없다고 결정을 내린 채 눈을 밟고 걸었다. 나를 해치던 말을 내 속에 두지 말자고, 다정함을 두른 채 건네던 말만 가슴에 꼭 새기자고  눈을 밟고 걸었다.   


뜨거운 손으로 흰 눈을 뭉쳐 만든 눈사람이 결국 녹았다. 


하얀 발자국이 시린 눈을 하고 내 뒤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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