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인(名人)

by KAKU

노벨상의 계절이 왔다. 올해 첫 노벨상 소식은 생리의학상에서 3명의 수상자가 발표되면서 시작됐는데, 그 3명 중 한 명이 사카구치 시몬이라는 일본인이라는 점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이제 30명이 됐다고 한다. 우리도 작년에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아서 노벨상에 대한 갈증이 조금은 풀린 것도 같은데, 기초과학분야를 생각하면 일본의 저력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일본인으로서 첫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 康成)다. 가와바타의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설국(雪國)’인데,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바둑을 소재로 한 ‘명인(名人)’이다. 명인은 보통 어떤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기량을 보여준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만, 바둑에서 특히 일본의 바둑계에서 최고수를 일컫는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한국에서는 국수(國手)라는 말이 바둑 최고수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일본에서는 명인이라는 말 외에 본인방(本因坊, 혼인보), 기성(棋聖)이라는 말이 바둑 최고수를 일컫는 말로 함께 쓰이는데, 기성, 명인, 본인방은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3대 바둑 타이틀 전이기도 하다. 일본 바둑계에서는 이 3대 타이틀을 모두 석권하는 것을 두고 그랜드슬램처럼 대삼관(大三冠)이라고 하는데, 한국 출신의 조치훈이 1980년대 초반 대삼관을 달성해서 일본 바둑계를 떠들썩하게 하고 한국에까지 바둑 붐을 일으킨 적이 있다. 80년대까지는 일본이 바둑의 메이저리그였다.


소설 명인은 당대 최고의 바둑 고수인 명인과 막 떠오르고 있는 젊은 바둑 기사의 대국을 소재로 한다. 1938년 실재 있었던 이야기다. 당대 최고수는 본인방 슈사이(秀哉)이고, 젊은 기사는 기타니 미노루(木谷實)다. 슈사이는 일본 근대바둑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본인방(혼인보)은 원래 일본의 유명한 바둑 가문인데, 그 가문의 당주에게 세습되는 명칭이기도 하다. 슈사이는 이 본인방 가문의 마지막 세습 본인방이고 이후 본인방은 타이틀 전으로 바뀐다. 기타니 미노루 역시 바둑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 실력이 뛰어났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수 많은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다는 점으로도 유명하다. 오타케 히데오, 다케미야 마사키, 고바야시 고이치 등 그의 제자들이 일본 바둑계를 사실상 평정했었고, 대삼관의 조치훈, 한국 근대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또한 기다니의 제자다. 60년대에서 80년대 후반까지 바둑 최고수의 계보는 곧 기다니 미노루 제자들의 계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


혼인보 슈사이와 기타니 미노루의 1938년 대국은 6월부터 12월까지 반년에 걸쳐서 치러졌다. 바둑 한 판을 두는데 반년이 걸렸다는 것을 요즘은 생각할 수 없지만, 과거 바둑 명문가문들이 개인을 넘어 가문의 명예를 걸고 대국을 벌이던 일본 에도시대에서는 수 개월, 수 년에 걸쳐서 바둑 한 판을 두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바둑 한 수 한 수에 혼을 담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

슈사이_기타니.jpg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슈사이와 기타니의 대국을 실제 신문에 관전기로 썼는데, 이 경험이 소설로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소설에서 본인방 슈사이는 실명 그대로 나오지만, 기타니는 오타케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서 나온다. 사실에 바탕을 했지만 소설이라는 말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관전기가 소설 ‘명인’으로 탄생하기까지는 2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 만큼 바둑에 관해 적지 않은 글을 남겼고, 바둑에 대해 깊은 사고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둑 자체에 있어서도 아마추어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가와바타의 바둑 친구 중에는 조훈현의 스승으로 유명한 세고에 겐사쿠도 있다. 조훈현은 일본에 바둑 유학을 갈 때, 원래는 기타니 미노루의 제자로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조훈현을 먼저 만난 세고에가 조훈현을 제자로 삼았다고 한다. 세고에 겐사쿠는 역사상 최고의 바둑 천재 중 하나로 손꼽히는 오청원(吳淸源, 우칭위엔)의 스승이기도 하다. 기다니가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서 바둑계에 이바지한 것과 비교해서 세고에는 한국의 조훈현, 중국(대만)의 오청원, 일본의 하시모토 우타로 등 한중일 3국에 각각 최고 수준의 기사를 제자로 길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세계가 극한의 허무를 나타낸다는 평이 있는데, 그것이 그의 자살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문외한의 입장에서 덧붙일 말이 없다. 다만, 가와바타가 자살한 후 3개월 후에 세고에 겐사쿠도 자살했다. 친구 가와바타가 자살하고 비슷한 시기 애제자였던 조훈현마저 한국으로 돌아가자 그 깊은 허무와 상실감이 세고에 겐사쿠의 자살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바둑은 어떻게 보면 아무 의미 없는 한가한 놀이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목숨이 걸려있는 세상의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바둑에 관해서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닐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어떻게 보면 모두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보면 존재의 모든 의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이 어떤 때는 한 없이 허무할 수도, 어떤 때는 한 없이 치열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로버트 레드포드와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