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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붙은 옥수수

by 불꽃

서울역 광장 노숙인 돕기 봉사자 중에 염경순 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에 논이 1400평 있는데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논 옆에는 갈대밭이 있는 데, 큰 키와 너풀대는 잎은 고고하기까지 합니다. 바람이 지나가면 화음을 맞춰서 스솰스솰 노래하는데, 가끔은 꿩과 비둘기도 와서 듣습니다.

이 논이 주변보다 깊어서 새로이 흙을 받아서 1m쯤 높게 돋우었습니다. 흙을 돋우느라고 모낼 시기를 놓쳐서 밭작물을 심게 되었습니다. 논 주인께서 제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넓어서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나누게 되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고구마도 심고 콩도 심고 고추도 심었는데, 저는 전체 땅 중에서 절반 정도 옥수수를 심었습니다.

옥수수 농사가 잘 되면 그때 봅시다 하고 우선은 무상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나중에 보자는 놈 무섭지 않다고 한다더니 농사가 하도 잘돼서(?) 한 푼도 못 드렸습니다. 지금도 미안한 마음입니다.


사는 게 팍팍해서 옥수수 심어서 살림에 보탬이라도 하자(?)는 귀한 뜻을 품고 심었습니다. 밀짚모자도 준비하고 삽과 호미도 하나씩 준비했지요. 트랙터로 밭 갈아주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갈아놓았습니다. 농사는 군에서 제대하고 아버님을 4년간 도운 경력이 있으니,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자신만만했습니다.

며칠간 땡볕을 벗 삼고 얼굴이 깜둥이 되는 고생 해서 옥수수를 심었는데 싹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가물었던 거지요. 지하수를 품어 올리고 물을 주고 해서 싹이 나오긴 했는데 옥수수가 크지 않아요.

가뭄이 심하니까 땅에 붙어서 올라오지 않는 겁니다. 날짜를 계산하면 벌써 허리까지 올라와야 하는데 안 크는 겁니다. 무릎도 안 올라왔습니다. 그 바쁜 가운데서 틈내서 물을 주러 다녔습니다. 이 녀석들은 남이 바쁜 것을 봐주지 않더군요.

그렇게 날짜만 허송세월하다가 드디어 비가,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장마는 평년보다 보름 이상이 늦었다나 뭐라나. 갑자기 물을 만난 옥수수가 쑥쑥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자라는데 이번에는 가늘게 키만 자라고 몸집이 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옥수수가 달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자연의 법칙과 시간은 어김없습니다. 남들 클 때 못 컸으니 더 크겠다고 우기지도 않습니다. 우리 딸이 키가 작으니 더 크면 시집보내겠다고, 점순이 아버지처럼 생떼를 쓰지도 않습니다.

나이가 차면 크든지 작든지 열매 맺을 준비를 합니다. 옥수숫대가 실해야 열매도 단단하고 튼실하게 달리는 건데, 가뭄에 나이만 먹고 크지 못했습니다. 늦은 장마에 갈대를 닮았는지 비실비실하며 키만 자라더니 옥수수도 실하지 못하더군요.


옥수수가 익어 가는데 이번에는 벌레가 가만두지 않더군요. 약 하나도 못했더니 벌레가 옥수숫대와 옥수수를 다 파먹었습니다. ‘그래도 농약 안 뿌린 유기농이니까’하고 자위를 했습니다.

옥수수 수확을 시작했는데 상품 가치 있는 것은 몇 개 되지 않는 겁니다. 작거나 벌레가 파먹었거나 옥수수 알이 할머니 이 빠진 것처럼 드문드문 박혀 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뚝배기보다는 장맛이라고 보기보다 맛이 기가 막혔습니다. 먹어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맛있다는 겁니다.

시골에서 농사지을 때 보면 과일도 맛있는 것은 벌레나 새들이 귀신같이 알고 덤벼듭니다. 맛없는 것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잘 익고 맛있는 것들만 파먹습니다. 우리 옥수수도 괜찮은 것은 다 벌레와 까마귀가 먼저 시식을 했습니다. 돈도 안 내고….

옥수수는 나무에서 너무 오래 두면 말라서 딱딱해지기 때문에, 그냥 입으로 먹는 옥수수는 완전히 마르기 전에 따야 합니다. 시장에서 파는 옥수수들은 쭉쭉 빵빵한 데, 우리 옥수수들은 하나같이 작고 못생겼습니다. 돈 받고 팔 수 있는 처지가 전혀 못 되었습니다. 아는 사람들 나눠주고,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그래도 쪽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어찌하나 고민을 하는데 아내가 하는 말이 서울역 식구(노숙자)들에게 가져다주자는 것입니다. 이 삼복더위에 삶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데, 아내는 자청해서 그 일을 맡아서 하겠다고 합니다. 아내에게 뽀뽀해 줘야 하는데 바빠서(?) 못했습니다.

토요일 아침부터 옥수수를 손질했는데, 벌레나 새가 먹은 곳을 도려내고 너무 못생긴 놈도 치웠습니다. 집에 작은 솥밖에 없어서 몇 번 되풀이해서 삶았습니다. 아내의 양쪽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시집올 때 보고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서울역 봉사활동은 매주 토요일마다 합니다. 평소에는 커피와 초코파이를 주는데 그날부터 3주간은 커피와 옥수수를 주었습니다. 너무 맛있다고, 별미라고, 참으로 오랜만에 먹어보는 옥수수라고 좋아하더군요. 서울역의 봉사단체에서 도시락이나 밥이나 빵 같은 것들은 주지만 옥수수는 안주거든요. 노숙자들이 스스로 사 먹지도 않고요.

살림에 보탬 주지 못하고 밭주인에게 보상도 못 했지만, 서울역 식구들에게 오랜만에 별미 준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몇 달이 지난 다음에도 옥수수가 맛있었다는 인사를 하는 노숙인 친구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걸 기억해 주는 친구들이 고맙지요.

작은 칭찬도 가슴 뿌듯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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