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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너는 언제 마음을 세탁했니?"

삶도 가끔은 세탁이 필요하다

by miso삼삼


세탁기는 단순한 가전제품이 아니다. 인류의 일상과 여성의 삶을 바꾼, 조용한 혁명이었다.

바티칸 교황청 기관지는 20세기 여성 해방의 1등 공신으로 피임약도, 근로의 권리도 아닌, ‘세탁기’를 꼽았다.


빨래터에서 허리를 굽혀 빨래를 빨던 손바닥, 비누 거품에 거칠어진 손끝, 햇볕에 말리던 기다림의 시간들이 이제는 버튼 하나로 대체되었다.

세탁기는 ‘전기하인’이라 불리며 여성에게 새로운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여성은 빨래 대신 책을 읽고, 비누칠 대신 그림을 그리며, 꿈을 꾸었다.

세탁기는 단순히 옷을 깨끗하게 하는 기계가 아니라, 인류의 삶을 바꾼 문명 그 자체였다.


이불빨래를 돌리고 건조기에 넣었다.

뽀송하게 나올 줄 알았던 하얀 이불에는 군데군데 초콜릿 같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이상해서 세탁기를 열어보니, 보풀필터에 검은 오물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한동안 필터 청소를 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기계도 이렇게 돌봄이 없으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면 마음속 필터가 막힐 때가 있다. 미움, 서운함, 후회 같은 찌꺼기들이 켜켜이 쌓여서 삶의 얼룩을 만든다.

보풀필터에 쌓여 있던 오물을 제거하고, 통세척 버튼을 누르며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언제 마음을 세탁했니?”


마음도 주기적인 세탁이 필요하다.

묵은 감정을 헹구고, 탁해진 생각을 짜내고, 남에게서 묻은 상처의 얼룩을 말려야 한다.

그래야 이불처럼 포근하게 타인을 감쌀 수 있는 마음의 품이 넓어진다.


통세척이 끝나고 다시 이불을 세탁기에 넣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나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둥근 세탁기 통 안에서 돌고 있는 건 단지 이불이 아니었다. 내 마음의 먼지들이 헹궈지는 시간이었다.


삶도 가끔은 세탁이 필요하다. 버튼 하나로는 되지 않지만, 마음을 들여다보고 다시 헹굴 용기만 있다면, 언제든 새로워질 수 있다.

뽀송하게 마른 이불 세탁이 끝났다. 그러나 내 마음의 세탁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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