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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국자와 주걱

by miso삼삼

안녕? 내 이름은 ‘국자와 주걱’이야.


강화도 끝 마을에서 살고 있어. 바람과 먼바다를 벗 삼아 유유자적하는 아주 작은 책방이지.


사람들은 나를 ‘독립 서점’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내 꿈은 꽤 커.

어떤 빵집처럼 — 맞아, 바로 성심당처럼 — “우리, 강화도 가면 국자와 주걱부터 들르자!” 하는 말이 전국에서 들려오는 그런 날을 은근슬쩍 기다리고 있어. 많은 이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국민 서점’이 되는 게 내 꿈이야.


그런데 여기는 워낙 한적해서 지나가는 발자국도 귀해. 바람이 나 대신 종일 읊조리고, 들풀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내지. 그래서일까, 나는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 무척 궁금해. 그들은 어떤 책을 좋아할까?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오늘 바람이 조금 세네. 바람은 가끔 마을 소식을 내게 가져다주는 유일한 친구야.

“오늘도 손님 없지?” 하고 놀리듯 창을 흔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나는 기분 나쁘다기보다 괜히 허세를 부려.

“이봐, 나도 한때 사람들로 붐비던 시절이 있었다고.”

그러면 바람은 늘 이렇게 말하지. “그건 네 착각이야.”

하… 친구 맞아?

내 이름이 왜 국자와 주걱인지 궁금하지? 이름을 말하면 다들 웃어.

“책방 맞아요? 식당 아니고요?”하고.

이 이름은 시인 함민복 선생님이 지어주셨어. 시인은 말했지. “숟가락과 젓가락은 ‘나’ 개인을 위한 도구이지만, 국자와 주걱은 ‘남’을 위한 식기.”라고.

그래서 내 이름에는 나눔, 함께 먹는 밥, 그리고 책으로 이어지는 공동체라는 뜻이 있어.

그래서일까. 나는 책을 파는 일보다, 누군가의 마음에 밥 한 숟가락 뜨듯 위로를 건네는 일을 더 좋아해.


밖에서 보면 나는 그냥 오래된 시골집 같아. 주홍색 지붕은 사계절 내내 저 혼자 붉고, 추녀 끝에는 거미가 슬며시 살림을 꾸려놓고 ‘여기가 내 집인데?’ 하는 표정으로 살고 있지. 지나다니는 사람이 적어서 나도 거미도 서로 간섭하지 않아. 우리는 이 마을의 ‘은밀한 공생 관계’야.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오면, 고요 속에 굉장한 우주가 펼쳐져 있어. 책들이 너무 꽁꽁 붙어있어서 “얘들아, 좀 떨어져 앉아라, 숨 막힌다.” 하고 내가 중얼거릴 정도야.

헌책은 새 책 옆에 앉아서 “요즘 애들은 종이 냄새가 약해”하고 투덜거리고, 새 책은 “선배님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좀 줄여 주세요”라고 받아치지. 내 눈에는 다 귀엽지, 뭐.


안쪽 비밀공간에는 퇴색한 고서들이 헛기침하며 앉아 있고, 텔레비전엔 나오지 않는 오래된 고백들이 가득해. 세월의 색으로 물든 책들은 마치 내 마음 한구석을 오래 쓰다듬어준 친구 같아.


특히 끝방은 내 영혼이 숨어 있는 곳이야. 빛바랜 보들레르 시집, 1974년 판 릴케 시집, 누렇게 변한 김수영 시집 『달나라의 햇빛을 밟을지라도』.

커피색 종이가 “나는 많은 손을 거쳤어.”라고 속삭이지. 값 구백 원을 찍어놓은 1977년 민음사 책도 대부분이 감탄해.

“와… 이게 진짜 있네요?” 그리고 꼭 한 명은 이렇게 말해. “사장님, 이거 팔면 안 돼요?”

그러면 나는 혼자 웃지. “미안해요, 그 책은 그냥 여기 있어야 해요.”


내 하루에 스며든 작은 에피소드들도 말해줄게. 어느 날은 이런 일도 있었어. 비 오는 평일 오후, 손님이 한 명도 오지 않아 ‘오늘은 그냥 잠들어야 하나…’ 하고 있는데, 중학생 남자아이가 우산을 뒤집어쓴 채 뛰어 들어왔지.

“여기… 혹시 삼체 있어요?” (그날따라 딱 한 권 남아 있었어.)

아이는 책을 품에 꼭 끌어안더니 말했어.

“버스를 한 시간이나 기다려서 왔는데, 그래도 오길 잘했어요. 책방이 참 아기자기하네요. 친구도 여기 진짜 좋다고 했어요.”

학생의 말을 듣는 순간, 내 지붕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어. 아니, 진짜로 조금 더 따뜻해졌던 것 같아.


또 어떤 날은, 연인이 와서 나란히 앉아 속삭이며 책을 읽었어. 둘이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파도처럼 잔잔하고 예뻤지.

나는 그 모습이 그저 부러웠… 아니, 아름다웠어.


하지만 책방의 하루가 늘 이렇게 잔잔하지만은 않아.

아이들이 오는 날은… 나는 정말 난리가 나. 책꽂이에 숨었다가 나타나는 작은 손가락들이 “이거 읽어주세요!” “저 이 책 알아요!” 자꾸만 졸라. 아이들 웃음소리는 마을 전체를 밝히지.


그런 날은 큰 선물을 받은 듯 마음이 아주아주 넉넉해져서는 구름 위를 날아오르게 돼.

그런 시간이 흐르고 지나며 나는 알게 되었어.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책뿐만 아니라, 조용히 쉬어갈 수 있도록 비워 둔 작은 '쉼의 자리'때문이기도 하다는 걸.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공기,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으로도 마음이 풀리는 시간. 나는 그 시간을 퍼주는 국자이고, 여백을 건네는 주걱이야.


외로운 마음에 스며드는 문장 하나와 잊었던 꿈을 깨우는 한 권의 책이 있는, 국자와 주걱은 그런 곳이 되고 싶어. 남을 위한 식기처럼, 필요한 사람에게 말없이 국 한 국자 떠주는 곳.


언젠가 멀리서 온 누군가가 바람 따라 이렇게 말해주었으면 좋겠어.

“강화도 가면, 국자와 주걱에 한 번 들러보자. 거기 가면 마음이 한 국자 정도 더 따뜻해진다더라.”

나는 그 말 한마디면 오늘도 바람 소리 들으며, 기쁘게 문을 열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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