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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함석지붕의 사계

by miso삼삼

‘가을, 삶을 노래하다.’

시립합창단의 정기연주회가 열렸다. 오십여 명의 합창단이 내는 소리는 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간결했고 감미로웠다. 눈을 감으니 가을 향기가 스며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함석지붕 위로 쏟아지던 한여름 소낙비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무대 한편에서 드럼을 연주하고 있었다.


드럼 소리는 나를 함석지붕 아래 살았던, 어린 시절의 집으로 데려갔다. 얇은 철판에 아연을 입혀 만든 함석지붕에 내리는 빗소리와 덜컹대는 바람 소리는 매우 요란했다.


새벽녘 봄비가 내리면 지붕이 제일 먼저 잠에서 깨어났다. ‘톡톡, 타닥타닥,’ 잔잔한 리듬은 자장가처럼 달콤했다. 복사꽃 잎이 미끄러져 내릴 땐 내 옆구리마저 간질간질했다.


여름 한낮, 함석지붕 위로 떨어지는 소나기는 시끄럽고도 조화로운 음악이었다. ‘우당탕, 탕탕,’ 우박과 빗방울이 함께 뛰노는 합주였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날엔 방 안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저녁이면 지붕은 서늘히 식어 하루의 고된 열기를 식혀주곤 했다.


장마가 길어지면, 낡은 지붕에 생긴 작은 구멍으로 빗물이 떨어졌다. ‘똑똑, 똑딱, 똑딱,’ 시계 초침 같은 리듬은 받쳐 놓은 양동이에 빗물이 낙하하는 소리였다. 어둑한 방 안에서 들리는 다정한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느새 잠에 빠져들곤 했다.


햇빛이 반짝이는 날이면 아버지는 지붕 위로 올라가셨다. 녹슨 함석을 새것으로 갈아 끼우며 못을 박을 때마다 ‘딱딱’ 소리가 났다. 나는 손에 땀을 쥔 채 아버지의 발끝을 따라 지붕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밀짚모자 위로 펼쳐진 하늘은 참 높고, 푸르렀으며, 아버지의 그림자는 유난히 길고 따뜻했다.


가을이 되면 지붕은 또 다른 소리를 들려주었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버티던 도토리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 낙엽이 바람에 밀려 구르는 소리, 가끔 바람이 지붕을 쓰다듬는 소리였다. ‘또르르, 사락사락, 사악,’ 함석지붕이 들려주는 노래는 세월이 천천히 걸어가는 소리 같았다.


겨울이 되자, 지붕은 침묵 속에 잠겼다. 눈이 소복이 쌓이면 함석지붕은 묵묵히 그 무게를 견뎠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방 안은 오히려 따뜻했다. 아궁이에선 장작불이 타올랐고, 엄마의 된장국 냄새가 집안을 감쌌으며, 함석지붕 아래 세상은 포근했다. 긴 밤이 지나고 난 아침이면 처마 밑에는 고드름이 매달렸다. 햇살에 녹아 떨어진 고드름을 동네 아이들이 주워 들고 칼싸움하며 놀았다. 아이들의 맑고 청아한 웃음소리를 지붕은 잊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 집은 없다. 함석지붕도, 못질 소리도, 낙엽 구르는 소리도 사라졌다. 대신 콘크리트 벽과 유리창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비가 와도, 눈이 내려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어쩐지 외롭다.


가끔은 함석지붕이 그립다. 비의 장단과 바람의 숨결, 함석지붕과 함께 웃고 땀 흘리던 사람들의 온기, 꽃송이 같은 함박눈이 지붕 위에 내려앉을 때의 속살거림, 세월의 무게를 숨기지 않던 솔직함이 그립다.


내 마음속의 함석지붕은 여전히 타닥타닥, 작은 울림으로 살아 있다. 꽃이 머리를 쉬게 해 준다고 말한 르누아르처럼, 나에게는 함석지붕 위로 내리는 시끄러운 빗소리가 머리를, 마음을 쉬게 해 준다.


우리의 인생은 빛날 때가 있고, 녹슬 때도 있으며, 겨울처럼 견뎌야 할 때도 있다. 사람은 그 모든 시간을 품은 뒤에야 비로소 온전한 온기를 가진다. 지붕이 비와 햇살을 함께 견디며 제빛을 만들어가듯, 사람도 기쁨과 상처를 함께 받아들이며 자기만의 색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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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