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다J Nov 21. 2024

서른이의 생활기록부

이사를 준비하며 by. 나다 

  [나다서른이의 생활기록부

           - 이사를 준비하며


학창 시절에는 그다지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것 같다. 영 대학진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상위권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는, 그러면서도 가끔은 특정 과목의 선생님들 눈에 띄었다가 “나다의 성적이 이것밖에 안 된다고?” 라며 놀라는 일이 있었던 정도. 다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교우관계가 원만한 듯 하면서도 실은 단짝이라는 존재가 없었던 학창 시절. 친구가 셋 이상이 되면 언제나 뒷전이 되었던 그런, 애매한 관계를 맺으며 10대를 보냈다.     


  속내가 어쨌든 학교라는 공간은 마지막엔 늘 성적표와 생활기록부라는 이름으로 지난 일들을 정리해주었다. 네가 얼마나 공부했고 어떻게 생활했으며 앞으로의 가능성은 이 정도 일 것이다, 라는 추측과 객관적 수치가 버무려진 종이 한 장.      


  당시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종이 한 장이 살아갈 때 요긴하게 쓰이더라. 나이가 들수록 더 그랬다. 대단한 대학에 뛰어난 성적이 아니었음에도 어찌됐든 졸업장이라는 것은 새로운 사회로 진입할 때 프리패스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막상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는 그런 일들이 없었다. 특히 프리랜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기에 인사고과와 같은 성적표가 주어질 리 없었고 일이 들어오면 그저 해내면서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잘 살고 있는지 남들과는 비슷하게 사는지 같은 건 어림잡아 짐작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 내 인생을 잘 정리해서 한 장의 페이퍼로 정리해주었으면 할 때가 있었는데,      


  그렇게 서른, 그리고 서른하나, 또 몇 해. 수많은 추측과 망상, 불안, 기대 등으로 점철된 서른이의 삶에 뜻밖에 성적표를 발급받았다. 바로 ‘은행’에서. 전세대출을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서류들이 몇 가지 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재직증명서와 월급명세서, 건강보험득실확인서, 하물며 가족관계증명서까지... 뭘 그렇게 달라는 게 많은 건지 왜 그렇게 증명해야 할 게 많은 건지- 따위의 생각을 했다가 따지고 보면 이 사람들이 날 뭘 믿고 돈을 빌려줄까 싶어서, 그리고 또 대출만 된다면 뭐든 다 할 기세로 나를 열심히 증명했다.     


  프리랜서인 내가 대출을 받기는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소득도 있고 세금도 내지만 은행 입장에선 무소득자와 다를 것이 없다. 몇 해 전에도 프리랜서로 대출을 받으려다가 은행의 차디찬 평가로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한 적이 있었다. 하물며 신용카드 발급에도 제약이 걸리는 걸. 올해에는 어떨까. 다행히도 나는 지금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도 작은 회사에 등록되어 있었기에 그 관문은 무사히 통과했다. ‘재직증명서, 라는 거 정말 대단한 거였군’이라는 생각과 회사 직인이라는 거, 진짜 무적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이 작은 회사에 등록되어 있는 동안 대표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 라는 무한 충성의 마음까지 생겼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거,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날 보증해줄 수 있다는 게 이 사회에선 정말로 중요하다는 걸 실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믿을 건 나밖에 없다’라며 외치던 내게 또 한 번의 깨달음을 줬달까. 


  그 뒤에는 오롯이 ‘나’에 대한 평가도 있었다. 나라가 시키는 대로 돈은 잘 냈는지, 썼던 돈은 잘 갚았는지, 아직 못 갚은 돈이 있는지 등등. 그런 면에선 나는 참 말을 잘 듣는 학생이었다. 어디선가 돈을 빼갈 때마다 이 도둑놈들, 이라고 외쳤지만(내가 쓴 것이긴 하지만) 그 도둑놈들 덕분에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 있더라.      


  남은 것은 그저 또 돈을 내는 것 뿐이었는데 내 통장 잔고가 성적표가 됐다. 지난 십 년 간의 젊음과 잠과 불쑥불쑥 치솟는 일탈욕구를 무시한 채 모아둔 돈들이 필요한 때마다 날 보증해주었다. 당장 계약금을 걸어야한다는 부동산의 말에 몇백만 원을 송금하고 여기저기 예약금을 걸고 하는 과정들이 매끄러웠던 건 그 지옥 같은 시간 덕분이었다.     


  엊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어김없이 여기저기 카드를 긁으며 서른이의 생활기록부를 들여다본다. 어린 시절 형편이 좋지 못해 겪었던 서러움이 떠오른다. 남들과 비슷하게 살고 싶어 악착같이 버텨냈던 20대, 그리고 여전히 애쓰고 있는 30대. 대충은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지고 있는 거 맞는 거겠지. 남들 다 하는 이사에 뭔 의미 부여가 많은가 싶지만 정말 피곤한 이 과정이 그래도 보통의 삶을 어느 정도 흉내 내고 있는 것 같아 깊은 충만감을 느낀다.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길었다. 드디어 며칠 뒤에 새집으로 간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떻게 기록되어질까. 새 학기가 시작된다고 해서 삶의 모습이 확 바뀌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마지막엔 웃으며 성적표를 받아들 수 있기를 바라본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 고통과 행복의 한끗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