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다운 시절엔 맞선 자리가 생기면 호기심도 가득하고
조금쯤의 흥분과 설레는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젊다는 자체 그 하나 만으로도 모든 게 다 눈부시던 시절이었으니 거칠게 아무것도 없었다.
점 점 낙엽에 가까워질수록 아이고 이걸 또 나가 말아..
고역스런 자리가 되다 보니 그날도 여지없이 홍여사와 한 판 씨름을 했다
이것아, 니 나이 생각도 해야지.
낼모레면 서른이여. 거저 줘도 거들떠도 안 볼 나이라고...쥐뿔도 없는 주제에 눈만 높아 시건방
떨지 말고 잘하고 와...
말은 그리 하지만 괜히 옷매무새도 만져 주고 신발도 가지런히 놔주며 제발 좀 나가 다오..하는 무언의 압력과 함께 은근 비위를 맞춰 주는 게 느껴졌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언니구 엄마구 절대 따라 나올 생각도 말어.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말고.
몰래 숨어있는 낌새라도 보이는 날엔 확 다 차버리고 나올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의례히 맞선 자리마다 껀수 만들어 쫓아 나오거나 몰래 뒤를 밟아 나름 숨어 앉아서는 귀 쫑긋 거리며 수군대는 게 불편하고 빈정상했다.
낼모레면 서른 고비인 처지에 정말 쥐뿔도 없으면서 뭐가 그리도 기세 등등인지 큰 소리 떵떵, 으름장을 놓으며 집을 나섰다
쥐뿔 있는 사람 다 나와보라 그래..
날씨는 또 어찌나 더운지 사람 찜 쪄 먹고도 남을
7월 30일 오후 3시.
작은 움직임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맞선에 대비해 새로 산 흰색 투피스가 선녀의 날개
옷처럼 하늘하늘 춤을 추었다.
햇빛 쨍쨍이어야 주름만 더 보일 텐데 시간을 너무 일찍 잡은 건 아닌가 하는 후회를 하며
호텔 로비에 도착하니 2시 30분.
햇 볒 쨍쨍 푸르른 날 보단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천둥 번개까지 양념으로 쳐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평소 성격대로 지각 같은 거 와는 거리가 멀다 보니 여지없이 일찍 당도해 시간 죽이기에 돌입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잠깐 동안 오만가지 생각에
머리가 저려옴을 느꼈다.
한 해 두 해, 나이 들수록 맞선이란 것에 자괴감이 들고 자신감은 바닥을 치더니 맞선 주선자를 원망하는
못된 버릇까지 생겨났다.
정말 마지막이라는 혼자만의 다짐을 하고 나오긴 했으나 혹여 마지막 기대치 같은 게 남아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인연이고 나발이고 다 포기단계쯤 일까,
그것도 아니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위에 하나 둘, 연분 찾아 떠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심 조급한 마음이 들었던지 그 당시 꿈을 꾸면 꿈속에서도 나이만 배 터지게 먹고
결혼을 못해 이렇게 혼자 살 다 가는 건 아닌가 하는
악몽에 시달리던 시절이었다.
애꿎은 계단을 몇 번 천천히 오르내리다 2층으로 연결된 짪은 에스카레이터를 서너 번 왔다 갔다 해도 그놈의 시간은 어찌나 더디기만 하던지.
나이 먹어 더는 못 할 짓이구나 아, 쪽팔리기도 하고
도루 빠꾸 해 가 버릴까 , 확 딴 데로 튀어 버릴까
아주 잠시 망설이다 에라잇 케쎄라쎄라!
맞선 남 만나기 100미터 전, 3시 십 분 전.
크게 숨 한번 들이쉬고 비장한 마음으로 커피 숖 문을
벌컥 열어 제꼈다.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휘황찬란한 상황을 보며 동공지진과 동시에 입이 자동으로 떡 벌어졌다.
옴마야.. 신천지도 아니고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호텔커피숍쯤 이면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대화도 조용조용, 사람들 행동도 조신하고 암튼
그런 분위기를 상상했는데 이게 웬 걸,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바글바글한 틈을 비집고 서로 머리 내미느라
아우성치는 노오란 콩나물대가리 시루처럼 맞선남녀들로 가득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 틈에서 맞선남을 찾을 엄두도 못 내고 주춤거리는데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카운터 여직원이 짜증도 살짝
곁 들여 앵무새처럼 조잘거렸다.
여기서 상대방 이름 확인하세요~
아니, 불친절하게 굴 거면 집에서 자빠져 잠이나 잘 것이지 왜 나와 민폐냐 ,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내 옆에 나란히 적힌 이름을 신경질적으로
쿡 찍어 주었다.
그러자 퉁명을 떨던 앵무새 여직원이 커다랗게
이름 쓴 종이를 들고는 딸랑딸랑 종소리와 함께
한 바퀴 휙 돌려는 찰나,
바로 코 앞에서 반가운 듯 활짝 웃으며 손을 번쩍
드는 그가 보였다.
쭈뼛쭈뼛 어색해하며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더운데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했어요 .
부드러운 눈빛의 남자가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는 점잖게 말을 건넸다.
중후한 체격에 낮고 그윽한 목소리며 따뜻한 시선이며 옳거니 좋았으..외모며 인상은 일단 합격!
내가 찾던 바로 오오오 그 이상형이었다.
그동안 쭉 선 본 자리들을 되돌려 보자면 키가 땅달하거나 주둥일 대바늘로 총총 꼬메버리고
싶을 만큼 말이 아주 많거나 빼짝 마른 송곳이거나 안경너머로 눈알이 팽팽 돌아간다거나
아니면 말 한마디 못 하는 숙맥이거나... 이 쪽에서 맘에 좀 든다 싶으면 상대가 냅다 걷어 차고 혹 상대가 흡족한 마음으로 애면글면 할라치면 이 쪽에서
보란 듯이 차 버리는 핑퐁의 연속이었다.
싫은 상대한테는 옷 깃 스치는 것 하나, 눈길 한번 주는 거에도 쌀쌀맞고 인색하게 굴 정도였으니 쌍방
순조로운 인연 같은 건 언감생심이었다.
굽이굽이 긴 긴 세월 돌고 돌아 서른 고비에 드디어 오날 날 낙엽 신세를 면하려나 보다,
이 낯설지 않은 느낌은 뭐지?....
짧은 시간에 혼자 흡족한 마음으로 파바박 머리를 굴리며 아이스커피의 얼음을 와자작 깨어먹는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원처럼 바라보던 그가 너무 시끄러우니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어떠냐 묻는다.
둘이 나란히 걸어 광화문을 지나는데 맥주 인지 호프빠인지 커다란 간판이 보이자 더운데 시원한 맥주 한 잔 할 수 있느냐 다시 묻는다.
뭐에 씌어도 단단히 씐 걸까 망설임의 망 자 도 망각한 체 조. 아. 요..
그 한마디로 맞선 날, 부추를 곁들인 훈제족발과 함께
어느새 짠~술잔을 마주하고 있었다.
술이라면 술 술 넘기는 술고래 우리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술 자릴 마다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소싯적 요리 뺀질 조리 뺀질 안 만나주고 비싸게 굴던 시절, 잠깐 미친 듯이 목메던 안경잡이 맞선남 왈: 겨울바다의 겨울바람 보다 더 차고 멀게 느껴진다던.. 그 콧대 높은 자존심은 어디다 내 버리고 단칼에,
한 치의 망설임 따위도 없이 조. 아. 요. 라니~~
얘기도 지루하지 않게 이끌면서 말투도 단정하고 상대방 배려하는 모습에 마치 오래 보았던 사람처럼 익숙하고 싫지 않은 저녁시간이었다
종로로 넘어 가 일부러 작심하고 고른 듯 한 공포영화를 보는데 꼿꼿이 다 보는 게 신기했던지 무서운 거 보면 어깨 뒤로도 숨고 손도 잡게 해 주고 뭐 그럴 줄 알았다며 씁쓸히 웃는다.
돌이켜 보면 홀라당 까진 거 없이, 앞 뒤 재는 거 없이, 대체 나이는 어디로 먹었니, 나이 값을 못 하는 거니.. 마냥 착하고 순수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엄밀히 표현하자면 세상물정이나 연애사에는 실기에 약한 멍텅구리, 바보, 빵점 짜리였는지도...
눈치 같은 건 어디로 내다 버린 건지 상대가 노리고 째리던 바를 헤아릴 줄도 모르는 깊은 동굴 속에 갇혀 낙엽 신세를 면하지 못했나 보다.
거기에 한 수 더 떠 찬물을 끼얹는 것도 아니고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배시시 웃으며 천진난만하게
무서운 장면 나오면 난 살짝 샛눈 뜨고 봐요...하니
어처구니없다는 듯 어찌나 큰소리로 웃던지
주위사람의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맞선 이후,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홍여사의 즐거운 비명 소릴 들어가며 귀가하는 시간은 의례히 그야말로 깊은 어둠이 마중 나오는
오 밤 중 밤 귀신!
장장 6개월간의 구구절절 사연 많은 연애 끝에
흰 눈 펑펑 내리던 날,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를 당당하게 외치고
나갔던 자리에서의 마지막 인연으로 서른 번쯤의
맞선 끝에 서른을 갓 넘기며 드디어 결혼에 골인했다.
한 살 차이 나는 남편은(정확히는 7개월 ) 한 살 차이의 밥그릇 수를 계산하며 심심찮게 하늘타령을 해 댔다.
코너에 몰릴 때면 늘 앞장서 달려오는 소리,
이 싸람아, 남편은 하늘이여...
그 점잖고 배려 깊던 행동이며 따뜻한 말투며 그윽한 음성까지도 다 우리 집 멍멍이한테나 줘 버린 건지
늘어나는 나이와 함께 철부지로의 변신을
마다하지 않았다.
잠결에도 손에 힘을 주며 놓치지 않으려 리모컨 쟁탈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 사람이 원래 티브이귀신이었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 정도였다.
쇼파랑 한 몸 되어 주전부리 까먹으며 흐믓한 표정으로 넋 놓고 있을 때면 바보상자니 , 학예회 수준이니 할 땐 언제고 나도 모르는 드라마의 줄거리까지 줄 줄 꿰고 있는 아주메가 되어 있었다.
밤하늘의 별도 달도 따 주마..
노랫속의 그 미더운 세상 남자들은 결혼이라는
무덤과 마주하는 순간 대체 다 어디로 한결같이
자취를 감추는 것일까.
맞선 날, 아무 생각도 없는 년처럼 술잔 기울이며
조. 아. 요.. 그 한마디로 엮이지만 않았다면 오늘날
내 인생이 다른 곳에서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지나 않을런지.
백만 년도 훨씬 지난 어느 뜨거운 여름날의
맞선이 바꾼 ... 내 인 생. 돌리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