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방송의 경연을 보다가 고장 난 수도꼭지 모냥
자동으로 눈물이 주르륵 흐르던 날이었다.
반듯하고 건실한 이미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한눈에 척 *선한 범생이* 처럼 느껴지는 안성훈 님의 엄마 꽃 이란 노래를 듣던 순간이었다.
고생만 하시는 본인의 엄마를 생각하며 가사에 직접 참여했다는 ..암튼 그런 소개가 이어졌다.
눈물이 나요, 눈물이 나요. 나 땜에 변한 것 같아...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화면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가사에 푹 빠져 들고 있었다.
문득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엄마가 새삼 떠올라
밤 새 이 생각 ,저생각 머리가 뽀개질 만큼 지난 일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유년시절, 물 한 방올 안 묻히고 유복하게 자란 우리 엄마는 인물 좋은 아버지 사진 한 장으로 덜컥 결정하신
외할어버지 뜻에 따라 얼굴도 못 본 체 시집을 오셨다고 한다. 외삼촌들이 최고 명문대 법대를 나온 것에 비해 부유한 환경에서도 딸이라는 이유로 공부를 맘껏 하지 못 한 것이 늘 펑생 한으로 남았다는
원망 섞인 노래도 평~생 부르셨다.
정치, 경제, 체육계는 물론, 선수 이름에 포지션까지 정확했고 심지어 예능이나 연예 관련까지도 후뚜루 마뚜루 다방면으로 박식함을 보였다.
신문지상에 나오는 모든 면을 다 꿰뚫는 끝없는 대화에 아버지로부터 니 엄마는 박사야 박사...라는 핀잔인지 농담인지도 심심찮게 들었었다.
생긴 순서대로 벼슬을 하자면 당연 대통령에 장관에..(순전히 우리 엄마 표현..)일등감인데 술을 너무나 좋아하던 아버지의 주정에 지칠 때면 아이고 웬수같은 인간...소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자식들에겐 거친 소리, 매 한번 드는 일 없이 늘 따뜻하고 좋은 엄마였다.
내리 딸만 셋을 낳는 바람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집년들...소리를 입에 달고 살던 할머니의 온갖 구박과 설움 속에서도 묵묵히 우리들을 감싸고 건사해 주시던 그리운 나의 어머니.
고생이란 걸 안 해보고 자라서인지 대범한 성격 탓인지
살림에는 그야말로 멍멍판 오 분 전, 살짝 거리가 좀 멀긴 했지만 가지 많은 나무에 어느 한순간도 바람
잘 날 없다는 아롱이, 다롱이 알록달록 제 각각 튀는
오 남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고루 나눠주시던 그런 분이었다.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던 셋째 딸이 서른 번쯤의 맞선을 끝으로 서른을 넘기는 동시에 결혼을 했을 때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표정으로 행복해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70 초반 한창 치매끼로 고생하실 땐 긴 병 끝에 효자 없다고, 자식들이 서로 떠 넘기며 혹여 요양병원으로 보낼까 싶어 잠깐씩 제정신일 땐
나 요양병원 절대 안 간다. 죽어도 내 집에서 죽을 거야.. 하시며 쓸쓸한 표정을 짓곤 하셨다.
치매 걸린 할머니 방을 어린 손주들이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을까 싶어 천 원짜리 스무 장을 봉투에 담아 베개 밑에 넣어두며 신신당부를 했다.
누구라도 엄마 한 번씩 들여다보는 놈 한테 천 원짜리 한 장씩 꺼내서 주라고...
어쩌다 가 볼 때마다 확인한 베개 밑의 봉투는 항상 같은 금액이었고 그 좋아하시던 티브이도 멀리 한 체
멍 하니 허공만 바라보다 난데없이 ㅇㅇ야 학교 가야지
하며 소리를 지르곤 하셨다.
국민학교 3학년 때인가 소풍날 사라져 밤늦게까지
만화가게에 처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꾸중 한마디 없이 손 잡아끌고 마중하셨다.
그날의 농땡이 충격 탓인지 치매 끼 이후, 한 번씩
학교 가라는 소리로 발작을 하며 발칵 뒤집곤 했었다.
본인이 맘껏 배우지 못한 탓에 학교를 안 가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여기셨던 분...
제정신일 땐 농담처럼 그날 왜 학교 안 갔느냐 이따금씩 물어보곤 하셨는데 소풍날 오죽하면 김밥을 못 싸 줬을까를 헤아리지 못했던 철부지는 오랜 시간
입에 쟈크 채워 꾹 닫고 있다가 나이 들어서야
김밥 안 싸 줘서..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을 뿐,
서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가슴속 가장 깊이
꽁꽁 숨겨 둔 서러움의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다섯 살 위의 언니가 고사리 손으로 밥을 지어 돌산에서 일하는 엄마 변도를 심부름 보낼 때면 중간쯤에서 밥 사이에 박힌 삶은 감자를 쏙 빼먹곤 했다.
꽁보리밥에 푹 푹 뚫린 감자 자리를 보던 엄마는 그 나머지마저도 입에 넣어주시며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 어느 따뜻한 봄날, 딸기가 먹고 싶다는 말씀에 가장 크고 좋은 것으로 사 들고 가니 모처럼
또렷한 정신이 되어 머리도 손수 감고 손,발톱도 다듬고 계셨다.
그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기분 나이쑤한 나머지
딸 들이 서로 농담 삼아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우리 엄마가 이제야 치매 끝, 제정신이 돌아왔나 보다
벽이며 천장에 똥 칠 할 때까지 오래오래 만
사시라고..입에 침도 안 바르고 그리 말하면서도
정말 그 지경까지 오래 사신다면 어느 자식이 앞장서 뒷수발을 감당할는지는 솔직히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
다 같이 모여 잠시나마 모처럼 화기애매했던
그날의 반나절 시간이 엄마의 살아생전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돌아서 나온 얼마 후, 들려온 엄마의 소식은 참담하고 서글프고 가엾고 한마디로 길지 않은
인생 그 자체가 불쌍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창문에 바람이 들어온다고 겨울 내내 걸쳐두었던 주황색 연꽃무늬 두꺼운 담요는 한쪽이 툭 떨어진 상태였고 오리털인지 닭털인지 베갯속을 밤새 혼자 쥐어뜯으며 얼마나 괴로워하셨을지 방 안엔 온통 흰털이 풀풀 날아다니며 제 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평생을 그야말로 쎄빠지게 안 해 본 일 없이 자식들 뒷바라지에 고생만 하다 혼자 쓸쓸히 먼 길 소풍 떠나신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유품을 정리하느라 모인 자리에서 또
한 번 자매들의 눈물바람이 이어졌다.
유품이랄 것도 없는 낡은 옷가지며, 아주 잠깐 좋았던 시절에 장만해 좋은 날에나 뽐 내고 아껴 입었을
듯한 비로도 한복 몇 벌이 전부였다.
깍두기 모양으로 납작하게 접은 만 원짜리 한 장을
스웨터 주머니에서 발견하고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양 볼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리 엄마 전재산이 단돈 만 냥?
어디 딴 데 꼬불쳐 놓은 건 아닐까?
아무한테도 주기 싫어 노자돈으로 다 들고 가셨나 보다 등등 .. 눈물을 들킬세라 어색한 분위기를 서로 감추느라 농담 인양 장난스럽게 얘기를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짠~해 지는 걸 지울 수가 없었다.
하긴 어느 자식 하나 누가 그리 살갑게 대했다고
딸랑 집 한 칸 외에 남겨진 것이 혹여 있을까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머나먼 길 혼자 쓸쓸히 떠난 마지막까지도 한없이 가엾다는 생각만 들었다.
신문지에 돌돌 말아 장롱 깊숙이 감춰 놓은 들기름
한 병에는 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지 그저 먹먹하기만 했다.
감춰두고 혼자 몰래 드시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누굴 주려 몰래 꽁꽁 숨겨두었던 것일까.
그깢 들기름 한 병이 뭐라고 아끼느라 감추질 말지
세상 등진 뒤에야 나타난 것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떠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슬픔은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라고 했던가.
살아 계실 적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볼 걸 , 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각자 살기 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소중한 걸 다 놓쳐버리고 지나간 후 에야 깨닫는 어리석은 시절이었다.
30년 차이 나는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어서야 차분하게 지난 시간을 되돌려 보니 새삼 떠오르는
모든 일 들에 그립고 미안하고 고맙다는 마음만 한가득!
더불어 평생 말 로도, 글 로도 해 보지 못했던 한마디
사랑합니다, 내 어머니 ...
49제 땐가 , 엄마 무덤가에 맴돌던 하얀 나비를 보며 우리 엄마가 나비가 되어 우리들 곁에 오셨나 보다
했던 것처럼 고생도, 아픔도 없는 그곳에서 훨훨 자유롭게, 평화롭게 지내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