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ny Dallara 라노비아
저 멀리 기차는 지나가고!
꿀을 발라 논 것도 아니고 산 귀신은 더더욱 아니고
발 길 닿는 대로, 맘 가는 대로 그저 산이 좋아서 였다.
눈이 부시게 푸르는 젊음의 한 때,
강촌, 대성리, 청평 등지를 틈만 나면 밥 먹듯이
누비고 다니던 어느 해 겨울..
주먹만 한 눈이 펑 펑 내리던 2월 초였다.
그날도 여지없이 강촌에 살~리~라 무언가에 이끌리듯 이름마저 포근한 강촌행 청춘열차에 몸을 실었다.
오랜 시간 단짝이었던 애실이와 배낭을 꾸려 그곳에 도착했을 땐 정오가 훨씬 지난 시간이었으나
추운 날씨 탓 인지 인적이 드물었다.
꽝 꽝 얼어붙은 구곡폭포를 보며 추위도 녹일 겸
잠시 휴게소에 들러 쉬어가기로 했다.
우리보다 먼저 있던 딱 두 명의 일행을 한눈에 촤~악 스캔하는 동시에 못 본 척, 무심 한 척, 다시 산을 오르려는데
저기요.. 배낭 들어드리면 같이 산행할 수 있을까요?
키 작은 안경 옆의 키 크고 마른 남자가 물었다.
그냥 가자며 팔을 꼬집는 내 손을 뿌리치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쿨하게 인심 쓰듯 애실이의 허락이 떨어졌다
희한하게도 그 애와 어디든 다니다 보면 갈 때와는
달리 돌아오는 길엔 머릿수를 뻥튀기 하는 비상한 재주를 부리는지 항상 두 배가 되어있었다.
어느 자리에서든 씩씩하고 밝은 표정으로 생글거리는 무기를 장착한 그 애의 특기는 주위의 시선을. 사로잡는 거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말도 잘하고
웃는 건 더 잘하고 , 상대가 맘에 안 든다 싶으면 주둥이 댓 발로 나와 찬바람 쌩쌩 날리는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누가 시킨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하는 행동이나
타고난 성격 자체가 햇살 가득한 양지였다.
미당 서정주 님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이라는
시처럼 환한 모습의 그 애를 보고. 있자면 정말 눈이 부시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장도였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이 바글바글 꼬이니 장사 타입이
잘 맞을 거라고, 자신도 인정하는 일이었다.
상대방 얘기에 진지하게 빠져들며 공감. 꾹! 써비스는 물론, 눈웃음 살살치는 센스까지 겸비한 꼬리 아홉 개쯤 달린 여우 중에 상 여우였다 .
좋게 말하면 사교성 끝내주고 친화력 갑... 이지만
살짝 비껴 표현하자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했다.
그날도 여지없이 눈 깜박할 사이에 둘 에서 넷이 되어 발길을 돌리는데 스스로 짐 꾼을 자처해 양 쪽으로 배낭을 두 개 짊어진 남자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
큰 키에 움직임도 크고 행동은 또 어찌나 민첩한지
아무 거칠게 없어 보였다. 날쌘 행동만큼이나 입놀림도 빠르고 수다스러웠는데 잠시도 쉴 새 없이 떠드는 입에 자물쇠라도 채우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운 존재였다.
날씨는 춥고 눈발은 점 점 더 거세지고 계획에도 없던 일행과 함께 움직이려니 갑자기 심통이 발동했다.
왜 니 맘대로 같이 가자 소리 했느냐는 짜증을 선두로
저만치 혼자 앞서가며 우리를 개무시하는 듯한
나머지 일행도 거슬리던 참이었다.
안경은 모 혼나고 나온 놈 마냥 인상을 못 피고
저 지경이냐...(사실은 지랄)
억지로 끌려 온 것처럼 불편하게 구네...
엉뚱한 데다 태클을 거는 내가 민망했던지 손가락을 입에 대며 듣겠다 조용히 좀 해.. 하는 애실의
주의가 이어졌다.
오빠만 셋인 집안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란 모태신앙 애실이는 한자 뜻 그대로 사랑의 열매라는 목사님이 지어주신 경건하고 거룩한 이름의 소유자였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길 축복한다는
기도와 함께 하사 받은 이름이라면서도 부를 때마다 표정이 굳어졌다.
커 갈수록 기생 이름 같아 싫다고 얼굴을 찡그리며 ㄹ 말고 ㄴ으로 불러달라고 소심한 앙탈을 부리곤 했다.
맑고 큰 눈으로 늘 잘 웃는 착한 애실이.
그래, 너 기분 꿀꿀하고 편치 않을 땐 애실아.. 말고 애신이라고 불러 줄게.
목사님 ,하나님 사랑 담뿍 들어간 이름을 거부하는
널 어쩜 좋으냐.
눈 길을 따라 휘적휘적 꼭대기까지 올라가 간식이며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서도 일행과는 동떨어져 우울해하는 안경의 모습이 보였다.
산 끝자락에 서서 애꿎은 눈 만 발로 후벼 파며 울분을 토하듯 한 번씩 냅다 걷어차기도 했다.
그것을 힐끔거리던 키다리가 못마땅한 투로 혼자
쯧쯧거리더니 특급비밀을 폭로하듯 속삭였다 .
세 살 연상 첫사랑 여자를 거의 2년여 열렬히 사랑했는데 돈 많고 나이도 훨씬 많은 남자를 만나 미련 없이 안경을 차 버렸다며 에구 불쌍한 놈...
소리와 함께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약 사 모아 죽는다며 전 날 그곳에 온 안경을 따라와 설득하는 중 이라고도 했다.
설득이 먹힌 건지 정말 죽을 마음은 없었던 건지
그때까지 약 안 털어 먹고 잘 버텨 줘서 기특할 뿐이라고도 했다.
거기까지만 하고 끝냈으면 좋은 친구를 두었구나...
나름 감동할 뻔했는데 농담인지 주책인지 푼수 떼긴지.
근데...정말 약을 사 모았는지는 자기도 안 봐서 모른다며 저놈은 심성이 약해 간 큰 짓은 절대 못
할 쪼다라는 걸 강조했다.
위기의 친구를 살짝 깔보는 것도 같고. 남자들만의 우정관은 모르겠으나 좀 얍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웃는 듯 걱정하는 얘길 듣다 보니 그래서 우거지상이었나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안경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고개를 들거나 실수로라도 마주치는 경우 없이 시선을 피하며 모든 걸 체념한 상태인 것 같았다.
심각하고 우중충한 분위기로 말 한마디 없는 안경에 비해 매사가 즐겁고 신이 난 떠벌이는 입도 안 아픈지 여전히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안경이 자리에 오자 따뜻한 커피를 건네주는 애실의 눈 빛이 더 따뜻해 보였다. 오래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하긴 생글생글 작정하고 덤벼드는 저 포커스에 걸려들지 않으면 등신이지 뭐.
경계하고 머뭇거리던 처음과는 달리 자연스레 두런거리는 소리와 이따금씩 웃는 소리가 올라 갈 때와는 훨씬 다른 분위기였다.
남겨진 떠벌이와 짝 아닌 짝이 되어 산을 내려오는 저 건너편에서 기차가 빠아아 앙 크게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눈발을 맞으며 걷던 키다리가 갑자기
잠바 안 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내더니 팔에 쓱 문질러 불기 시작했다.
TonyDallara의 라노비아.
여고시절 소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영어선생님이 어느 날 창밖을 응시 한 채 처연한 눈빛을 발사하며 원어로 불러 분위기를 압도했던 그. 노래였다.. 묵직한 전주로 시작되는 동시에 토니 달라라 만의
낮고 그윽한 음색에 빠져 그 순간부터 좋아하기 시작했던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을 소환했다.
어느 여고생 하나가 선생님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한바탕 소동을 피운 뒤로는 수업 중에 절대 아무에게도 눈을 마주치는 역사가 없었다는 전설이 전해졌다.
무표정 속의 금방이라도 눈물이 그렁그렁 고일 듯 한
쓸쓸한 두 눈은 항상 창 밖 고정!
잠시 넋 나간 채 하모니카를 부는 키다리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수다스러운 성격과는 달리 수려하고 반듯한 조각상 같았다.
무궁무진 끝없이 떠드는 입만 좀 닫는다면 훨씬
달라 보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찌나 말이 많고 시끄러운지 제발 그 입 좀 다물라, 다물라...마음 속 한편에서 아우성치던 그때 , 눈보라 치는 절경을 사뿐히 뚫고 들려오던 때 아닌 하모니카와 라노비아의 콜라보라니..
기집애모냥 조잘조잘 쉴 새 없이 떠들던 상대가 갑자기
달라 보이던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앞팀이 하모니카를 불던, 옛 추억에 빠져있던
안중에도 없는 안경과 에실의 대화 속 웃음소리가
작은 메아리 가 되어 산자락에 울려 퍼졌다.
올라갈 때와는 달리 애실을 바라보는 안경의 눈에서 생기가 도는 것이 안정되고 편안해 보였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상대로 느꼈는지 수줍은 표정이며 행동거지마다 조심스러운 게 정성을 가득 담아 배려하는 게 느껴졌다.
일상으로 돌아온 후 에도 틈만 나면 넷이 모여
강촌 멤버라는 명분으로 시간을 같이 보냈다.
산에서 커피를 건네주던 애실의 커다랗고 맑은 눈과 마주치던 순간 죽어야겠다는 마음을 거둬들였다는 얘기도 나중에야 알았다.
애실이 못지않은 커다란 눈을 가진 사람이
하나, 둘 인가....제 눈에 안경이라고, 어느 찰나의 순간에 엮이는 인연이란 게 따로 있구나 싶었다.
맑다 못해 푸르딩딩 빛이 나던 그 애의 눈은 어떤 땐
파아란 하늘같기도, 또 어떤 땐 잔잔하게 출렁이는 호수를 연상케 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 그대로.
결국엔 눈 마주치던 어느 한순간, 둘의 인연이 이미 정해진 운명처럼 느껴졌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운명적인 만남 같았다.
배신의 상처로 약 사모아 죽으려고 올랐던 산에서
우여곡절 끝에 얽힌 인연이다 보니 더 애틋하고 감사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모태신앙 애실이의 간절한 기도가 통한 것 일까.
구하라 얻을 것이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니라...
생글거리는 애실의 옆에서 쑥스러운 듯 조용히 웃는
안경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음악도 좋아하고 글도 잘 쓰고 때와 장소 불문,
늘 한결같은 이야기보따리 수다쟁이는 언제나 배낭 한가득 카세트에 테이프까지 한 세트로 구비해 다니며 DJ처럼 원하는 곡을 다 신청받는다고 떠벌였다.
어느 한 곳에 꽂히면 집착하는 병이 있는지
한동안 그 짓을 하며 수선을 떨었다;
수다 떠는 양 만큼의 다른 분야까지도 훤히 꿰고 있다는 건 인정할 만한 사실이었다.
간혹 한 번씩 고집을 부릴 때면 자신만의 아우트라인을 만들어 모든 것을 본인 위주로 기준 삼는 바람에 안경과의 총돌도 불사했다.
활달한 성격뒤에 숨겨진 어두운 그림자를 내보이며
분위기를 망칠때마다 진심을 담아 다독이는 안경의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만났던 날의 상황과는 정 반대로 흘러가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족는다는 거 쫓아가 설득하고 달래 준 것에 대한 보은이라도 하듯이 변함없고 과묵한 안경의 태도는
늘 한결같았다.
야유나. 비웃음 같은 건 손톱만큼도 안보였다.
어느 날인가는 넷이 모여 명동성당 밑으로 주욱 늘어선 웨딩숍을 지나는데 침 튀기며 흥분하는 키다리의 모습이 보였다.
저것 좀 봐 , 입으면 정말 이쁘겠다.
언젠가는 저거 꼭 입게 해 줄 거야.
결혼식은 산에서 하는 게 좋겠어
신혼여행도 배낭 메고 떠나자.
산이 너무 좋아 이 산 저 산 날아다니며 꼭 산에서 결혼식 할 거라는 소리를 간혹 하기도 했었다.
혼자 결정으로 김칫국 마시냐,
대체 누구한테 하는 소리냐는 안경의 농담을 들으면서도 그 대상이 누군지는 확실히 모른 채 , 굳이 확인 사살 할 필요도 못 느낀 채, 그냥 그런가 보다...라는 단순한 만남이 이어졌다.
아니, 안경과 애실의 커플 옆에 그림자놀이 하듯 살포시 묻어가는 존재라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정말 좋거나 굳이 싫다는 느낌도 없이 그냥 넷이 자연스레 어올리다가 어느 순간 들러리가 된 듯한 기분이 들면서 키다리와 더 흐지부지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결정적 원인으로는 맘 놓고 떠들어
제끼는 수다가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입이 화근이 되지 않게 항상 입단속을 잘 해야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도가 더 심해졌다.
생각이란 걸 가치지 않고 그냥 내뱉는 소리에 간혹 넷이 모였을 때도 삐그덕 소리가 튕겨 나왔다.
드레스를 보며 혼자 흥분해 미처 날뛰듯 침 튀기는
모습을 보면서도 대체 누구한테 하는 얘긴가 싶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질 못 했다.
당연히 그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확고하다 보니
점 점 더 불편한 관계로 여겨였다.
고해성사라도 하듯 심각한 표정으로 홀어머니에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왜 불우한 가정사를 내게 텰어놓는 걸까,
내가 모르는 누구네 집 이야기일까 싶어 듣는 둥
마는 둥,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러다 어느 한순간 아니다 싶으면 그날로 아웃 시켜버려야지 하는 혼자만의 오기를 부렸다.
말 한마디 없이 입 꽉 닫는 불편한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체념의 권리를 깨우치게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니까.
같이 만난 한쪽이 흐지부지한 상태로 여차하면
떼어낼 궁리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안경과 애실이는 비밀리에 지들만의 데이트를 즐겼다.
추운 계절에 만나 다시 그 계절이 돌아오고
딱 일 년이 지난 시점에 처음 넷이 만났던 장소를 갔는데 그곳에서 안경은 애실이에게 청혼을 했다.
약 사 모아 죽는다며 쓸쓸한 표정으로 허공만 응시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안경너머의 두 눈은 의욕이 넘쳤고 작은 체구에서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성남의 땅부자 아버지를 둔 외아들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 결혼하는데 로 외국 나갈 계획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눈 내리는 날의 강촌이 엮어 준 인연이었다.
주먹보다 더 큰 눈이 펑 펑 쏟아지던 날, 결혼식장에서 보았던 키다리는 잠깐 알고 지냈던
모습이 아닌, 영락없는 이방인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냥 자연스레 흐지부지 상태로 멀어졌었다.
사회를 보는 당사자의 빼빼 마른 모습이며 어느 곳에도 눈길을 두지 않는 것이 낯설기만 했다.
변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 수다쟁이가 말을 한마디도 안 하고 못 본 척 쌩깐다는 자체가 더 낯설었다.
아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까인 건가.
잠깐 지나간 시간 속에서 우리들은 어떤 사이였을까.
아무런 사이도 아닌 사이임이 틀림없었다.
라노비아를 듣던 순간의 우연이 필연까진 미치지 못한 사이인듯 싶었다..
죽는다는 친구를 뜯어말리려 따라왔다가
애실이를 엮어 준 짧은 시간 속 들러리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까.
강촌 어느 산 한 자락에 하모니카 소리만 남겨둔 사이.
때때로 한 번씩 라노비아를 떠올리게 하는 먼 기억 속의 그냥 그런 사이었었나 보다;
죽음의 기로에 놓였던 상대방을 맑고 커다란 눈으로
단번에 사로잡았던 애실이는
어느 하늘 아래 잘 살고 있을까...
문득 오래된 기억 속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
할 일 없어 잠깐 마음의 여유를 부려 보는
어느 겨울날에~
할 일이 없다는 게 이토록 평화로울 줄이야!
아 좋구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