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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뻥쟁이글쟁이 Mar 09. 2024

간뎅이 부은 년!

가지 많은 나무 중  셋째


나의 엄마는 식들 키우며  매는커녕, 거친 욕  스므리 한 것도 없이 아롱다롱 가지 많은 나무를

 길러 낸  그런 분이었다.

but,  간혹  놀리 듯. 놀란 듯 나를 향해 한번씩 했던

소리가 바로' 간뎅이 부은 년..'이었다.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최소한의 의 절차도  내다 버린 채  선택도, 결정도 뭐든  멋대로 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하셨다.

대체 누굴 닮아 저 모냥이냐,  

무대뽀도 저런 무대뽀가 없어,

하는 짓 보면 간뎅이가  배 밖으로 나왔다니까.

이 담에 너 같이 똑같은 딸 낳아 키워 봐라 ...

어릴 때부터 귀에 익은 욕인 듯 욕 아닌, 욕 같은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흘려 넘겼다.

엄마도 화난 표정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었고 , 듣는

도  정말 간뎅이가 부었는지, 배 밖으로 나왔는지

그저 실실 웃어넘기면 그만이었다.

정말 간이 부었거나 배 밖으로 나온  상황이라면

수술도 불가한 중증 환자일 텐데 그 무시무시한 소리를 농담으로 주고받는 모녀 듀엣이었다.

소리 소문도 없이  조용조용 행동으로 밀어붙이는 걸

보며 무서운 년 이라고도 했다.

우리 엄마 최대의 욕은' 년 ,  오로지 그거 하나였다.

마음먹은 대로, 입에서  내뱉은 고대로 행동에 옮기 걸 보며 저 드러운 년 건드려봐야 본전도 못  찾다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셨다.

기껏해야 나오는 욕이 '년... 소리가 전부였던 우리 엄마한테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 하나 있었는데 성질

 잔뜩 부리며 보란 듯이 도시락 안 가져가는 일이었다.

일부러  눈에 잘 뜨이는 곳에 팽개쳐 두고 저만치 나가다 보면ㅇㅇ 야...부르며  헐레벌떡  뒤따라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는 꼬깃꼬깃한 지폐를 주머니에 찔러 주시며

굶지 말고 꼭 뭐든 사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침 한 끼 굶는 게 무슨 큰 일 날  일이라고,

점심 한번 거르는 게 무슨 난리가 처 들어올 것처럼 중한 사안이라고  밥 굶는 거에 벌벌 떨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온몸으로  꼬라지 났다는 표시를 내 보이며 본체만체  쌩...하니  돌아서곤 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할 때마다 아침도 굶고 도시락도 안 가져가는 시위를 일삼았다.

엄마 눈에야 하루종일 쫄 쫄 굶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매점 들락 거리며 먹을 거 다 사 먹고 희희낙 하루를 알차게 보내다 집에 갈 때쯤이면 다시 주둥이 댓 발로 원위치시켰다.

엄마 눈치 한번 쓱 살핀 후, '나 아직도 화 났음, 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표출했다.

문도 거세게 쾅 쾅 닫고 욕실 물도 퍼 끼얹으면서  쿵쾅거리는 소란을 떨었다.

아침 굶고 점심은 건너뛰다 오는 것으로만 여겼는지  근심걱정 한가득 담긴 밥상대령은 물론,  어여 먹으라고 숟가락까지 쥐어 는 동시에  풀옵션으로  원하는 것 들어주었다.

에그,  쇠심 줄 보다 질긴 년...

니 에미 팔아다 써라...하는 소리가 밥상 위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들릴 듯 말 듯 ' 웬수같으니라구, 하는 작은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원플원 끼워 주는 것처럼  뒤따랐다.

정말 미워서나 웬수 같아서가 아닌. 애틋함이 잔뜩 묻어나는 소리였다.

밥 굶는 강력한 무기를  내세우는 엄마와의 투쟁에서 승리는 언제나 내 차지였다.

어려운 형편에 고된 시집살이를 거친 탓인지 자식들

밥 굶는 걸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워하셨다.

그 방법을 가장 교묘하게 이용하며 엄마 울궈 먹는 데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참고서나 자습서 산다는 핑계쯤이야  기본 중에 기본이었는데 알면서도 매번 속아 넘어가는 엄마 주머니 덕에  한동안 극장 문턱발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공부하는데 필요한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시에는 아낌없이 내주더니 먼 훗날, 느닷없이

사기꾼 과거를 폭로했다.

저 년은 하루돌이 가 멀다 하고 참고서, 자습서 핑계를

 얼마나 대던지 삥땅 치는데 아주 도가 텄다며

네 죄를 네가 알렸다...하는 표정이었다.

언제나 늘, 한결같이 피식 웃는 웃음 속에 모든 말이

 다 내포되어 있었다.

나  역시 엄마가 속아 주는구나 하는 걸 알면서도

그때그때  이유나 핑계를 다르게 만들어 내는 머리를 굴리며 맘껏 누리던 전성기였다

명동의  유네스코 회관이나  광화문 국제극장,

종로의  단성사를 들락거리며 토욜 수업이 끝나는 동시에 요이~땅~ 떼거지로 몰려 가  영화 보는 재미에

 푹 빠반 미치광이 영화 광 시절이었다.

파격적인 숏 카트로 당시 단발을 유행시켰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리나  상적인 로인

잉그리드 버그만,

로미오와 쥴리엣의 비운의  주인공이었던

청순가련 형 올리비아 핫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에서  모든 남자를 한 손에 쥐고 흔들었던 스칼렛 역 비비안 리,

로마의 휴일에서  얼떨결에 세상밖으로 마실 나온

엉뚱 발랄 귀여운  공주님 오드리 헵번,

미 동부 도시에서 서부로 시집온 자이언트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새색시 리즈테일러,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제 마음이 아플 거예요

지금도 귀에 익은 사랑의 스잔나 One summer Night

진추아, 아비 커플...등등등등...

개봉하는 족 족 안 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조바심을 내었고, 광활한 설운을 배경으로 달리는

한 폭 그림 같은  열차에,  처절함과 안타까움이 화면을 뚫고 나오는 닥터지바고는 세 번 정도...

보고 또 보고였다.

우수에 찬 눈빛의 이집트 출생 배우 오만샤리프에

매료되던  철부지 사춘기였다.

슬프고도 애절한 La La's Thems와 더불어 서시적인 영화의 메인 영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대문을  휩쓸고 다니던  아, 옛날이여!


조용한 듯 강력하고  돌발적인 데다  눈에 거슬리면  

 그 꼴을 절대  그냥  봐 넘기지  않던  시절이었다.

나한테 걸리면 다 죽었으...

3대 독자  남동생이  나가 놀다  얻어터지고 질질 짜는 날에는  이유 불문, 연탄집게 들고뛰어 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누가 때렸냐, 왜 울었냐 소리도 묻지 않고

연탄집게를  무기 삼아 즉시 범인을 찾아 응징했다.

욕쟁이  우리 할머니는 기집애들 (4녀)틈에서 자라 기를 못 펴 저 모냥이라며  얻어터지고 오는 일 까지도 집애들 탓으로 돌렸다.  그 놈의 기집애 소리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남 타박하거나  변명하거나  주절주절 이유 붙이는

그런 것들과  친하지 않은 내 성격  상  불의를 보면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 직성이 풀렸다.

열한 살 동네 짖꿎은 남자애들 다 물리치고 골목대장을 역임했으니 이름하야 장위동 행동파 우두머리였다. 간뎅이 부은 년 다운  자리였다.

나이도 어린 기집애가 골목대장인 것이 양날의 검

일수도 있겠지만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싸움으로 정정당당하게 겨누어서 오른 자리였다.

내 인생  최초의 벼슬이었다.

점 집 단골인 엄마가 신년운수 핑계 삼아 매년 점을

볼 때면 치마만 걸쳐  여자라고, 장군감이라고 했단다.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 소리 다음으로 싫어하는 소리였다.

선도 안 보고 데려가긴,  개 뿔,

장군감 은 개뿔, 니들이 게 맛을 알어?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아무리 아롱이

다롱이에, 알록달록 제  잘난  멋 이라지만 눈 부라리고  성질을 부릴 때면  걸 진짜 내가 낳은 게  맞냐 혀를 내두르곤 했다.

자랄 때부터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껌뻑 안 하고 커다란 눈만 떼굴떼굴 굴린다며  저 속엔 능구렁이가 수백 마리쯤 들어앉아 있을 꺼라고도 놀렸다.

좀처럼 우는 일도 없고  다섯 중에 젤 가운데 짱 박혀

 위, 아래로 치여서인지 그야말로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조용히 자랐다.

누가 먼저  건드려 놓지만 않으면  만사형통이었다.

그러다 한번 거슬렸다 하면  날 잡아 푸닥거리하듯

 문 쾅쾅 부서져라 처 닫는 것을 시작으로  난동을 부렸다.  깡패도 이런 깡패가 없었다.

내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중 학교 1학년 2학기때  장위동에서 화곡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 시절에  집안이 잠시  빤!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었고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입만 뻥끗하면  금 나와라 뚝딱!  하듯이 엄마 주머니가 자동으로 술술  열렸다.

2학년 올라가면서 셋이  그룹을 만들어   친구 오빠에게 영어과외를 받기로 했다. 신촌의  명문대 토목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주 2회. 요일을 정해 방과 후 친구집에 모이는 방식이었다.  그 당시 한 달 과외비가 칠천 원이었는데 내 맘대로 정하고 내 멋대로 결정해서 엄마한테는 통보만 했다.

요구사항 안 들어주면  삐쭉대며 소심하게 투덜거리던  형제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선 결정, 후 통보였으니 간뎅이 부은 년은 역시 달랐다.

수업료가 삼만 원대 시절이었으니 열다섯의 나이에 혼자 결정하기는  과외비도 만만찮은 거액이었다.

"돈 줘, 나 과외하기로 했어."   말 꺼내기 무섭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이 척 척 나왔다.

굳이 따로 배워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좀 살만 했던 시기에  나름대로의 사치를 부리고 싶은  욕심이

작용한 것 같았다. 나 과외받은 여자야...

지금처럼  사교육이 치열할 때도 아니고 과외나  학원도 드물었던 시기에  지 오빠 용돈벌이라도 해 주려함인지   내가 그  포섭대상 1호였다.

명색이 영어과외인데  영문과도 아닌, 쌩뚱맞은 토목과에..그렇다고  과외선생이 특출 나게 멋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과외받는 날  친구네로 가면  후줄근한 차림에 금 일어난  부스스한 머리로 하품을 찍찍 하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무릎 툭 튀나온  하늘색  츄리닝

단벌신사였고  라면냄비를 끼고 사는 일상이  명문대생  이라기 보단 날백수에 가까웠다.

 어쨌든 배우러 갔으니 셋이 둘러앉아  과외라는 걸

하긴 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기억에 남는 건 단 한 줄.

who put  a  drop  on the cat's  neck !

서너 달  배우다  에잇 , 고양이 목에  방울소리만

남긴 채  흐지부지  쫑내버렸다.


순진하고 마냥 선한 우리 엄마 주머니를 과외비로만  털어먹은게 아니라 오버가 맘에 들지 않으면 학교 앞의 양장점에서 멋대로 척 척 맞춰 입었다.

이것 역시 내 멋대로 맞추고 후, 통보하는 절차였다.

멀쩡한 거 내던지고  디자인 골라 다시 맞추는 걸  보던 엄마가 는 얼굴로 칭인지, 핀잔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분명 칭찬은 아니었겠지만 웃는 얼굴이었으니 아마 칭잔이었을 듯 싶은 착각 에 빠졌다.

언니 때는 (1호)  없 살 때라 그랬기도 했지만

다 낡은 거 얻어다 입혀도 군소리 없이 공부만 잘 하더라. 실제로 1호는 낡은  교복을  얻어 입히기도 했고 , 모처럼  새것을 살 때면 최소한 3년을 입어야 하니  너무 큰걸 산 나머지 몸에  옷을 맞추는 게 아니라 옷에다 몸을 맞춰야 할 정도라고 했다.

쟤는(2호) 또 어떻구. 겉 멋이 잔뜩 들어서는

새로 사 입혀도 지 멋대로 썩둑썩뚝 잘라 허리에 딱 달라붙도록 지가 되는대로 듬성듬성 꼬매  입고

다니더니,  넌 어째 제대로 된 걸 해 줘도 니 멋대로

 다시  맞추고  난리를 친다니..

베짱이 두둑한 건지 간뎅이가 부어도 한참 부은 년 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교복 입는 거 한 가지만 봐도 성격이 다 나온다는 말을 덧붙이며 그래도 속 안썪이고  할 일  다 하는 내가 사내아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아쉬워 하셨다.

에휴, 선도 안 보고 데려가,

장군감인데  치마만 둘러 여자에다

사내아이 이길 바라다니. 내 원 참,

이런저런  듣기 싫은 소리 다 들어도

간뎅이 부은 년이라

다 걸러내며 잘 먹고 잘 산다는~


'이 소리가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소리도 없이 일 저지를 때마다  이 광고 카피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소리 없이 강. 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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