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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Earth Apr 11. 2022

숙제 vs 연휴의 평화

숙제하기 싫은 날

대체휴일로 뜻밖의 연휴 마지막 날. 

큰 아이가 아침부터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오늘은 어디가지?"

덩달아 내 손도 휴대폰에서 바쁘게 움직인다. 빨리 어딘가를 찾아야겠다는 초조함을 숨긴 채...

과학관을 가려고 했는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이른 시간을 놓쳐버리니 갈 곳이 없어 일단 아침밥부터 챙겨먹이고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는데 아차!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아들아, 내일 일기장 내는 날 아냐??!"

"..."


아이는 9월 말 즈음부터 한 달 프로젝트를 진행중이었다.

학교 숙제가 아닌 나 자신이 세운 계획을 한달 동안 꾸준히 실천해보고, 성공하면 자기 자신에게 선물 한 가지를 해주는 프로젝트. 공부는 엄마를 위한 것이 아니기에, 아이 스스로 정한 목표를 스스로 실천하고, 스스로에게 선물을 해보라고 했었더랬다. 오늘만 지나면 이제 딱 일주일의 기간만 남아있었던 것.


하지만, 아이는 뭔가가 아침부터 뒤틀린 듯했다. 

한 달 프로젝트 내내 다행히도 어디 가기 전에 숙제부터 끝내라 하면 한 마디만 해도 바로 알아듣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할 일을 하던 아이였다. 불과 어제만 해도 스스로 하니 엄마의 잔소리가 줄어서 좋다고 말하던 아이가 아니었던가. 뭐랄까. 일주일밖에 안남았다 하니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달까. 아이는 하기 싫어 예전에 나와 하던 그 레파토리를 반복하고 있었다.

"왜 내가 지금 숙제를 해야 해? 갔다 와서 하면 안돼?"

"지금 안하는 숙제를 갔다와서 할 수 있을까?"

"지금 숙제 하면 숙제가 많아서 못 간단 말이야. 학교에서 미처 못 다한 숙제도 해야 된다고."


아하. 바로 그것이었구나.

엄마인 나는 일기 하나만 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이에게 오늘은 2주에 한 번 있는 청소날이기도 했고, 마침 학교 등교 날에 못 다한 숙제도 해야 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숙제를 마치고 나가야 했으나, 이제는 나도 익숙하게 아이와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것을 피할 줄 알았기에 씨익 웃으면서 "다 하고 가면 돼."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자리를 피했다.


어차피 엄마가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승복이 안되었던지 아이는 속으로 씩씩대며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다행인 건, 나도 직접적으로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았고, 아이도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던지 문을 쾅 닫지 않고 조용히 닫고 들어간다. 물론 입을 빼죽 내밀고, 발을 쿵쿵 걸으며 자신이 화났음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현관문을 발로 뻥뻥 차고 문을 쾅 닫고 엄마를 밀치고 때리던 옛날에 비하면 너무도 훌륭히 화를 절제하고 있었다.


"밥 먹을 거니?"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문을 열고 밥을 먹냐고 묻기도 한다.

입을 빼죽 내밀며 싫다고는 하지만 예전처럼 문을 잠그지는 않는다. 서로 조심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아무렇지도 않게 작은 아이와 밥을 먹고, 아이가 화를 풀기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 남편이 슬쩍 들어가 아이가 좋아하는 랍스터를 먹겠냐고 물으니 슬쩍 고개를 끄덕거리는 아이.

밥을 먹을 때는 기분이 다소 풀어진 듯했다.


아이는 방에 들어가서 일기를 반쯤 썼다고 했다. 그리고는 책을 몽땅 가지고 가서 책을 읽고 있었던 것. 책을 읽고 있자니 마음이 스르르 풀렸던 모양인지 밥을 다 먹고는 한참을 다시 책을 보다가 일기 다 쓰면 나갈 수 있냐고 물었다. 

"응, 학교 숙제 다하고 내일 가방 다 싸면 돼."

아이는 조용히 방에 들어가서 일기를 썼다. 왔다갔다 내게 계속 무언가를 확인하려 물어보면서 낑낑대더니 환한 얼굴로 일기장을 들고 내 앞에 섰다.

"이제 가도 되는 거지?"


낮잠시간이 까마득하게 지나버린 작은 아이를 챙겨 입히고 온 가족이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내 맘대로 남산.

작은 아이가 낮잠을 자는 동안 아빠와 둘이 곤충채집이라도 보낼 의향이었는데 남산에 다오도록 작은 아이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고, 남산 주차장은 이미 만차. 하악하악... (이를 어쩌지?)

속으로 그 짧은 시간 머리를 휘리릭 굴렸다. 아이들은 뒷자리에서 다른데 가자고 성화다. 큰 아이는 드라이브를, 작은 아이는 놀이터를 외치며 다시 분열이 일어나려는 찰나. 북악스카이로 가자며 상황을 급 수습했다. 자꾸 행선지를 바꾸니 슬쩍 화가 난 듯한 남편을 달래서 북악스카이로 향하는데 늘 밤에만 가다 5시의 다소 이른 시간에 간 광화문 풍경은 낯설기도 하고, 바글바글 사람들로 활기 넘치는 거리 분위기가 신기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모처럼 (늘 잠들 때만 가던 청와대 거리를) 깬 상태에서 청와대 옆길로 지나가며 화려한 분수와 경찰 아저씨, 총을 든 군인아저씨를 보며 신기해했고, 다행히 기분 좋게 북악스카이로 향할 수 있었다. 

북악스카이에서 주차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데 남편이 과감히 주차 줄로 들어서버렸다. 그냥 집에 가자는 큰 아이의 아우성과 놀이터 가자는 작은 아이의 아우성 속에서 나와 작은아이가 먼저 내렸다. 그러자 졸린 눈을 부비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나서는 큰 아이를 달래서 옆 산길로 내려가보았다. 

속으로는 참나무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 한가득이었다. 모처럼 나온 작은 아이는 신나서 저 멀리 달려 내려가버리고 큰 애는 시큰둥하게 그 뒤를 따라가고 나는 뛰어가며 작은 아이를 붙잡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참나무가 발견되기 시작하고, 시큰둥하던 큰 아이 눈도 다시 초롱초롱해지기 시작했다. 늘 채집채집 노래를 부르다가도 막상 채집가자 하면 늘 핑계 한 가득 대며 여긴 없을거라며 지레 포기하는 큰 아이.

나는 그런 큰 아이에게 지레 포기하지 말고 계속 시도해볼 수 있도록 휴대폰 손전등으로 이리저리 비추어가며 참나무를 찾아주었고, 다행히 다시 북악스카이로 올라오는 산길 위에서 찾으려던 사슴벌레는 아니지만 "고마로브  집게벌레(암컷)"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곤충에 매우 열심인 큰 아이 눈이 초롱초롱해지며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말이 많아진다는 건 이 곳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라 나도 내심 안도했다.(마음에 안들면 집에 갈때까지 계속 툴툴대느라 온 가족 기분 다 상하게 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얼마만에 오는 북악스카이인지. 아마 작은 아이 데리고는 처음이니 5~7년 만에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늘 올 때면 바람이 쌩쌩 부는 늦가을이나 겨울이었는데 오늘도 비 온 끝이라 그런지 바람이 꽤나 매서웠다. 긴 팔에 얇은 점퍼까지 입었지만 날씨가 꽤나 추워서 얼마 못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입구에 있던 긴 줄넘기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두 아이 각각 하나씩 차지하고는 돌리기 시작했다. 작은 아이가 멋 모르고 돌리기에 펄쩍 뛰는 시늉을 해주었더니 두 아이 모두 까르르 숨 넘어가도록 웃는다. 큰 아이도 아빠가 줄을 돌리며 "꼬마야" 노래에 맞춰 줄을 넘다보니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뜻밖의 즐거움에 모두들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팔각정에 올랐다. 입구에 있던 윷놀이, 투호놀이도 즐기고 전망대를 한 바퀴 돌려 서울N타워도 보고 내려오니 저 멀리 잔디밭에 새끼 고양이가 보였다. 뛰어내려가보니 아주 작은 새끼고양이 두마리가 우리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다가오고 있었고, 저 멀리서는 엄마 고양이인 듯 두려운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새끼 고양이들은 우리쪽으로 다가오다가는 다시 가버렸지만 아이들은 마냥 새로운 볼거리가 즐거웠던 듯 한참을 팔각정에서 신나게 놀았고, 편의점에서 각자 맛난 먹을거리를 하나씩 집어들고 차에 오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빼빼로를 기분좋게 씹어먹던 작은아이는 어느새 잠들고, 우리는 큰 아이가 고른 버터오징어와 꼬깔콘, 그리고 둘째 손에서 스르르 빼낸 남은 빼빼로 7개를 나눠먹고는 낄낄대면서 즐겁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일기가 장황해진 건, 예전과 달라진 큰 아이와 나의 갈등 해소방법 때문이다.

상반기 때만 해도 우리 둘은 갈등상황이 생기면 무조건 서로를 헐뜯으며 몸으로 싸우고 밀고 때리고 씩씩댔었더랬다. 엄마도 아이도 어른이 아니라 아이 둘이 되어 그저 짐승처럼 본능대로 싸웠던 것.

하지만 그 싸움이 결국 서로의 감정만 소모시킨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서로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설 줄 알게 되었다. 


갈등상황이 생기면 일단 "~~하고 ~~하자"라고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차분하게 의견을 말한 뒤, 쓰윽 자리를 피해 아이 스스로가 감정을 추스를 수 있게 시간을 주었다. 아이가 스스로 화를 식히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되 필요한 말이 있으면 (엄마는 화가 난 게 아니야 라는 걸 보여주려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걸었다. 아이가 화를 추스르고 나오면 싸움의 원인이 된 것-오늘의 경우 일기라는 숙제-을 끝낼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려준 후 다 마치고 나면 최대한 아이의 기분에 맞춰주었다. 

바로 이 방법이 상반기 내내 싸움에 싸움을 거쳐 아이와 내가 찾은 해법이었던 것. 화를 내지 않았지만 아이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추스린 후 차분하게 할 일을 할 수 있었고, 그 할일이 끝나고 놀이라는 커다란 보상을 주니 아이도 성취감을 느꼈을 터다.


아는 만큼 깨닫고, 느끼는 만큼 성장한다.

여지껏 해야할 일이 있었을 때 아이가 화를 냈던 건, 아이를 충분히 기다려 주지 않고 아이가 정해진 시간에 할 일을 다 못하면 하루종일 아이가 놀지 못하게 했던 벌칙 때문이었던 것이다. 내 입장에서야 큰 아이를 기다리느라 작은 아이를 놀리지 못했던 경험이 쌓여서 고육지책으로 모두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시간을 정해 할 일을 시켰던 것인데, 아이는 시간의 억압 때문에 더 긴장해서 숙제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숙제를 못할 것이라고 지레 포기하고 놀이까지 포기하는 게 속상해서 그리 화를 냈던 것이리라.

오늘은 작은 아이가 마침 나가기 싫다며 집에서 놀겠다고 하기에 마음 놓고 큰 아이를 기다려준 것이었는데, 그 기다림이 큰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큰 아이에게는 숙제만 하면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나에게는 "아이에게는 기다림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준 귀한 경험이 된 것이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아이와 같이 성장중이다.

오늘 엄마도 아이도 한 뼘 더 성숙해진 하루가 되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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