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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Earth Nov 29. 2022

조선의 백만장자 간송 전형필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큰 아이의 독서 슬럼프기.

기존의 독서영역만으로는 한계가 와서인지, 늘 읽던 책만 쥐고 다른 책을 보려고 하지 않는 큰 아이.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 그게 뭐 나쁘겠냐마는, 안타깝게도 큰 아이는 책 읽기 자체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책을 쥐고는 있으나 책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도 보이고, 심심할때면 책을 쥐던 모습도 보기 쉽지 않았다.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다가 어느날 하루 아이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아들아, 엄마 오랜만에 도서관 가서 책 좀 빌려볼까 하는데 빌리고 싶은 '새로운' 책이 있을까?"

"응? 엄마 꼭 새로운 책이어야 해?"

"응. 요즘 만날 책 한 권을 들고 읽긴 읽는 것 같은데 재미있게 보는 것 같지 않아서, 새로운 책을 좀 찾아볼까 하고... 지리 책은 어때?"

한참을 생각하던 아이가 꺼낸 말은 의외였다.

"엄마, 그럼 위인전 빌려줘."

그 길로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빌려온 책이 바로 '조선의 백만장자 간송 전형필,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였다.


'전형필'선생은 생소하지만, 그의 호 '간송'은 많이 들어보았다. 드라이브길에 지나곤하던 '간송미술관'

유명세를 타는 미술관이라는 풍문만 들었을 뿐, 미술에 조예가 없는 나로서는 한 번 들르는 게 왜 이리 어려운지... 일제시대 우리나라 유물을 지키기 위해 전 재산을 쏟아부어 일본으로 팔려가는 각종 문화재들을 사들여서 박물관을 만들었다.

역사책에 한 두줄로밖에 간단히 나오지 않았지만, 이번에 이 책을 읽고 나서 그가 얼마나 큰 일을 해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삼성이나 현대가의 자제 정도 되는 재산규모를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자란 전형필. 남다른 역사 감각을 가진 외사촌형 박종화의 영향으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흔들림없이 민족성을 지킬 수 있는 역사관을 지니게 된다. 어찌보면 최상위 재산가로서 일제에 붙어 더 많은 부를 누릴 수 있었을테지만, 부모와 자신이 양자로 들어간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많은 부를 다 물려받았으면서도 허투로 쓰지 않고,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전 재산을 값어치있게 쓸 수 있었던 기반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렸을 때부터 역사책을 좋아했지만, 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 키울 수 있었던 건 5학년 큰 아이를 위해 도서관에서 빌려오곤 하는 수많은 역사동화나 역사책들 덕분이었다.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데, 우리나라 역사서나 역사 교과서에 '가야사'가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일제의 식민사관과 일제시대의 문화재 약탈 영향이라고 했던가.(기억나지는 않지만, '대한민국 역사여행 버킷리스트'에서 본 것 같다.)


가야사를 중시하려 했다면 고려나 조선시대 때에도 충분히 다루어질 수 있었기에, 꼭 식민사관의 절대적인 영향 탓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가야사의 연구 기반이 될 고분들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일본의 오쿠라(큰 도둑)과 오구라(작은 도둑) 등에 의해 마구잡이로 도굴되어 제 1호 고분 등의 숫자로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도굴, 약탈된 문화재는 오구라 컬렉션 등의 이름으로 일본의 박물관에 여전히 전시되고 있다.

   

근대사와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다룰 때 우리나라 국민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감정적으로 역사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역사에 접근하려면 충분한 근거자료가 있어야하는데, 가야사는 그 근거가 될 고분의 유물들이 도굴꾼에 의해 마구잡이로 도굴되는 바람에 연구 자체가 불가능해졌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로, 간송 전형필이 우리나라 역사유물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여전히 과소평가 되고 있는 점은 안타깝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부모와 양부가 모두 돌아가시고 나서 물려받은 재산으로 문화재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라는 판단이 서면 그 값이 아무리 비싸도 무조건 사들였고, 심지어 판매자가 가격을 낮게 불렀다고 판단되면 그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사들였다. 또한, 문화재로 돈을 벌지 말라는 그의 스승의 부탁을 끝까지 지켜 사들인 문화재는 되팔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해방이 되고 나서도, 그는 안심할 수 없었다. 애써 지은 박물관이 6*25 전쟁 시기를 거치며 북한군에 파괴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첫번째 피난길에 급히 오를 때에는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아 다른 문화재들은 모두 박물관에 두고 갈 수밖에 없었는데 해례본만큼은 소매에 꼭 싸서 자기 몸처럼 들고 다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노력 덕분에 전 세계에서 한글은 만들어진 과정과 어원이 정확하게 기록된 유일한 언어가 되었다. 하지만, 개발시기를 지나며 미국에서 우리나라 유물에 대한 전시회가 개최되었을 때 역사 유물의 의미를 깊이 알리 없는 후손들이 간송 전형필을 얼마나 비웃었던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나름 역사 과목에서는 거의 만점을 놓친 적 없을 정도로 교과서를 파고들었던 나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역사교과서에서는 전형필에 대해 들어본 바가 없다. (문구 한 줄 정도 있다고 하더라도 아마 시험문제에 나올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사들인 수많은 문화재들은 해방 후 국보로,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들이 많다.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 유물들이 여전히 일본을 비롯한 세계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지 않았을까.


서울로 돌아가면(우리는 지금 시골에서 1년차 유학생활중이다.) 간송 미술관을 꼭 찾아가봐야겠다. 남편, 아이들과 함께 북악스카이 방향으로 드라이브 갈 때면 지나치는 곳인데 한 번도 가보지는 못했다. 기회가 되면 이 책을 읽은 큰 아이, 그리고 작은아이 모두를 데리고 가서 간송 전형필 선생의 업적에 대해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6*25 때 이 곳에 있던 유물들이 많이 파괴되어 안타깝지만, 역사를 보는 눈을 키워 너희들도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는 첨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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