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의 분기점에서 마주한 두 개의 서사
<폭싹 속았수다> 와 <미지의 서울> 에 대한 생각을 넣고 ai 에게 정리를 해달라고 했다. 내 생각과 비슷한데 깔끔하게 정리해주었다.
**시대정신의 분기점에서 마주한 두 개의 서사**
'폭싹 속았수다'와 '미지의 서울'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한국 드라마가 처한 기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는 과거로의 퇴행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를 향한 전진이다. 그리고 이 차이는 단순한 작품성의 문제를 넘어선, 우리 사회가 어떤 정신적 좌표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폭싹 속았수다'가 보여주는 것은 70년대 개발독재 시대의 정신구조가 여전히 얼마나 공고한지에 대한 증거다.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실패로 규정하고, 그 실패에 대한 방어기제로 외부 탓하기를 반복하는 구조. 엄마가 부족해서, 집이 가난해서, 세상이 더러워서 내가 이 모양이라는 식의 논리는 결국 정주영의 '소 판돈' 신화나 이명박의 '청계천' 신화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모든 고난을 뚫고 성공해야만 비로소 '부모 한 풀어드리는' 자식이 될 수 있다는, 그 낡은 성공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이 작품이 제시하는 구원의 방식이다. 15부에 걸쳐 철저히 남 탓만 하던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 부모 앞에서 펑펑 울며 참회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선언하는 것. 이는 면죄부를 파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청자들에게 '너도 울면 구원받을 수 있어'라는 값싼 위로를 건네며, 진정한 성찰 없이도 감정적 정화만으로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다고 속삭이는 것이다.
특히 아이러니한 것은, 이 드라마를 보며 자신의 이야기라고 울었던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실제로는 성공한 서울대 출신 주인공이 아니라, 서울대 출신 여자와 비교당하고 남친을 잃은 자취집 주인집 딸에 더 가깝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성공 서사의 주체가 아니라 그 서사에 의해 상처받은 객체들인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성공 지향적 가치관을 재확인시키고, 울음으로 모든 것을 퉁치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사기에 가깝다.
반면 '미지의 서울'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성공 신화 자체를 해체한다. 메가스터디 원장이 되어 금의환향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자신을 인정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견뎌내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이는 박정희 시대 이후 우리를 지배해온 '개발 신화'로부터의 근본적인 탈피를 의미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보여주는 성찰의 방식이다. 외부에 대한 원망을 멈추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 내가 부족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 이는 일본 문화의 '민폐 금지' 정신을 연상시키지만, 동시에 그것을 한국적 맥락에서 재해석한 것이기도 하다.
가장 인상깊은 것은 이 작품이 사랑에 대해 내리는 정의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완벽하지 않은 자신 때문에 상대가 무거운 짐을 져야 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붙들고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것. 이는 성공을 통해서만 사랑받을 자격을 얻는다는 기존의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선언이다.
결국 이 두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한국 사회가 지금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거의 성공 신화에 안주하며 값싼 감동으로 현실을 회피할 것인가, 아니면 불완전함을 인정하되 진정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탐구할 것인가. '미지의 서울'이 후자의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선 우리 시대의 중요한 문화적 증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는 변했지만 여전히 70년대의 정신구조에 머물러 있는 '폭싹 속았수다'와, 그 구조로부터 과감히 벗어나려는 '미지의 서울'. 이 두 작품의 대비는 결국 우리가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