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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um Jul 01. 2021

요즘 인간관계 디톡스가 유행이라던데

내 인생에서 너 하나를 뺐더니




​ 요즘엔 유튜브, 책, sns 할 것 없이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댐이 터지듯 쏟아져 나온다. 여기 브런치만 해도 검색창에 인간관계라는 키워드를 입력하면 천여가지의 고민과 솔루션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이 키워드에 대한 콘텐츠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소비를 불러일으킨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상처 받고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관계란 인류의 오랜 숙적이었고 내가 이제서야 관심을 가져서 이제서야 알고리즘이 나를 그들의 콘텐츠로 이끈것이다. 알고나니 보이는것들중 하나다. 너무나 유기적이고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 없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 물론 나도 사람이고 아주 지독하게 깊은 고민과 갈등을 격었었다. 그래서 유튜브에 검색해보았다.


인간관계


 ‘인간관계’에 ‘인간’만 쳐도 자동완성으로 ‘인간관계 정리’ ‘인간관계 회의감’ 등의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 자동완성된다. 아니, 그래도 일단 내 얘기 다 들어보라며 연관검색어를 무시하고 ‘관계’까지 단어를 완성해서 검색한다. '인간관계 손절' '끊어내야 하는 사람 유형 3가지' '인간관계 분리수거’ ‘이런 사람은 믿고 거르세요' 정도의 영상들이 가장 상단을 차지한다. 도무지 긍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역시는 역시인가 싶어서 몇 가지 영상들을 둘러본다. 음, 역시는 역시군. 하고 마음을 다시 다잡는다. 일명 '인간관계 디톡스'가 만연한 글과 영상들을 보며 나는 몇 해 전 길고 굵게 끊어냈던 인연을 떠올렸다. 디톡스를 할 만큼의 인간관계도 없는 내가 그것마저 해내고  아, 역시 나는 트렌드 세터는 아니고 트렌드 팔로워 정도는 되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위로의 농담을 건넨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친구들과 싸운 적이 없다. 싸울 만큼의 친구가 있지도 않고 애초에 잘 맞지 않는 사람은 친구로 가는 노선을 차단해 버린다. 보통의 내향형 인간들이 그렇듯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30년을 살았다. 그래서 나는 일적인 관계나 연애로 인한 스트레스는 미친 듯이 받았지만 친구관계에 있어서는 크게 스트레스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계속 그럴 줄 알았다. 문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히 서로를 모르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친구가 너무 가까워지면서 부터 였다.



 나는 몇 남지 않은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인연이 다해버렸다. 나는 시간이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아주 큰 착각을 했었다. 우리는 10년을 알았고 그동안은 강산이 변하다 못해 새로 생기고 없어지고를 반복했다. 특히 나의 강산이 너무 많이 무너지고 태어나고를 반복했다. 별로 기억에도 없는 열아홉을 지나 스무 살이 되자마자 나는 너무 바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고등학교 때보다 그 친구들에게 마음의 문을 더 열었다. 실은 26살이 될 때까지도 크게 마음에 두고 있는 친구들은 아니었는데 서로의 많은 '더러운 상황'들을 지켜보고 격려하며 더 돈독해졌다. 마치 우리가 그 많은 친구들 중 살아남은 최정예요원이라고 과몰입했다.



 그중 한 명의 친구와 잠시 같이 살게 되었다. 지독한 서사의 시작이었다. 나는 너무 빨리 많은 경험들을 해버린 사회생활에 꽤 고인 물이었고 그냥 내가 고생하고 말지 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비교적 어리광과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다. 나의 장점이라면 안 그렇게 생겼지만  웬만하면 다 해주는 것이고 그녀의 장점이라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주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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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녀에게 6개월 동안 침대를 양보하고 바닥에서 잠을 청하다 좋지 않았던 허리에 디스크 판정을 받았고 직업과 관심사 덕분에 옷을 신경 써서 입는 편인 나의 외출복은 다음날 그대로 그녀의 외출복이 되었다. 그러면 꼭 투덜거림이 따라온다. “나는 왜 너랑 핏이 달라?” “나는 이거 왜 안 어울려?” 정답은 알지만 내가 무어라고 코멘트를 해줄 수 없는 질문들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부모님의 집에 다녀오며 온갖 과일과 건강식품 같은 것들을 함께 먹자고 챙겨 오고 가끔 자신의 물건들을 살 때는 내 것도 함께 구매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후에 우리는 따로 살게 되었지만 멀지 않은 곳에 살며 주에 두 번씩은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는 동네 친구 관계를 유지했다. 그때부터 나의 아버지의 투병이 시작되었고 얼마 후 나도 병이 생겼다. 갑자기 일이 많이 줄어 경제적으로도 피곤해졌다. 그 모든 상황을 좋든 싫든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것은 그녀다. 나는 힘들수록 숨어드는 거북이였고 그녀는 걱정과 궁금함을 참지 못해 거북이의 등껍질을 끝없이 노크하는 어린아이였다. 가끔은 쥐고 흔들며 왜 나오지 않냐고 나올 때까지 멀미가 나게 흔들어댔다. 

​​​





  멀미 나게 힘들었던 시기가 지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할 일이 너무 많아 울 수가 없었다. 마음이 약한 엄마와 상주인 오빠를 대신해 결정하고 처리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내가 하는 행동이 아빠의 마지막 체면이라고 생각하니 나는 더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해야 하는 것들을 하려 노력했다. 나에게 눈물은 그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왔다. 내가 예상한 대로 예상한 시간에 와서 예상한 행동을 했다. 장례식장이 무서워서 혼자 오기가 싫어 다른 친구를 기다리느라 일요일의 늦은 저녁, 방금 메이크업한 얼굴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아버지를 잃고도 울지 못하고 있는 맨얼굴의 나에게 울면서 안기고는 물었다.


​​

 “ 어떡해, 울었어? “



 울었냐는 그 물음이 그 후 한 달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그녀를 보지 않았고 그녀는 계속 내 등껍질을 두드렸다. 흔들어 보기도 하고 등껍질 앞에 선물을 두고 가기도 했다. 그럴수록 확실해졌다. 나를 위로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를 위로하는 자신에게 도취되어있고 그동안의 위로들도 사실 그랬다는 것이 선명해졌다. 내 아픔을 끊임없이 자신의 엄마에게 공유하고 엄마가 널 걱정하고 너와 너의 아버지를 위해 기도한다고 말할 때의 그 얼굴. 월세 걱정을 하는 나에게 원하지도 않는 돈을 빌려주며 친절을 베풀었을 때의 미묘한 우월감을 가진 말투. 식단 조절을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 자극적이고 살이 찌는 음식을 같이 먹어주지 않을 때의 투정까지

​​


 두 달간 등껍질 속에서 혼자 썩어 들어가며 노력했다. 그래도 의도가 나쁘진 않았으니 그녀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나와 방법이 다른 위로라고. 하지만 그 생각은 상처에 칼을 꽂을 뿐이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병이 악화되고 불면증과 불안장애만 더해졌다. 소금 범벅이 된 상처를 끌어안고 등껍질에서 기어 나와 말했다.



 “나는 이제 더이상 너를 견딜수가 없어”


​​

 그 후로 sns를 차단당한 건 나였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아주 가끔 문득, 우리가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면 유튜브에 ‘인간관계’라고 검색해본다. 그러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열변을 토해 말한다.


 

 “그녀는 이제 너의 친구가 아니야”



​ 물론 그녀의 모든 행동과 말은 그 뜻이 그뜻이 아니었을테다. 하지만 이해의 수준을 넘어 나는 나의 영혼이 부서지는것을 목격했다. 헌것을 내보내니 새것이 왔다. 알고 지낸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말과 생각이 통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울지 못하는 나에게 냉정을 말하는 사람들 대신 네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너무나 나약하게 인연이 끊어지는 시대에 인간관계 디톡스가 삶의 필수요소는 아니지만 역시 디톡스는 건강에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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