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번, 본가에 가서 저녁을 요리하고 아빠의 재활치료를 도왔다. 몸으로 하는 재활운동은 병원을 따로 다녔고 나는 언어치료를 담당했다. 나는 전문적인 재활 지식은 없었지만 다행히도 21세기에 사는 사람이었다. 인터넷의 도움과 아빠가 퇴원할 때 병원에서 받은 <실어증 환자를 위한 교재>를 적극 활용했다. 아빠는 말하는 것은 어려워하지 않았지만 글자들을 인식하기 어려워했고 단어와 사물을 연관 짓지 못했다. 사람 그림을 두고 “ 아빠, 허리가 어디에 있어?” 하고 천천히 물으면 다리나 머리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종종 한글도 헷갈려하기 일수였다.
아빠는 한글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나는 영유아의 한글교재와 초등학교 1학년의 국어 교재를 인터넷으로 찾아 주어, 목적어, 서술어, 명사 따위를 아빠가 어떻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먼저 공부했다. 병원에서 받은 교재를 주로 사용하며 생전 처음으로 아빠에게 칭찬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아빠, 눈 어디 있어?
가위는 어떻게 생겼을까?
맞았어, 그거야! 잘하네
아빠가 나에게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을 높고 친절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면 아빠도 내가 처음 보는 장난스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에헴 하고는 했다. 그때부턴 뭐든 서로에게 처음 투성이었다. 젓가락질을 할 수 없게 된 아빠의 밥숟가락에 처음으로 반찬을 올려주었고 가끔은 직접 먹여주기도 했다. 혼자서 외출을 할 수 없게 된 아빠의 산책을 따라나서 팔짱을 끼고 지팡이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빠에게 숙제를 내주기도 했고 아빠는 공부시간이 길어지면 하기 싫어져 딴소리를 하며 요령을 피우기도 했다. 가끔 나에게 보고 싶다고 전화를 했고 지난주에 봤는데도 너무 오래된 것 같다며 언제 오냐고 투정하기도 했다.
아빠는 공부가 하기 싫어져 다른 이야기를 할 때면 주로 오빠와 내가 아주 어렸던 시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네 가족 모두 젊고 건강했던 시절을 이야기했다. 어릴 적 나는 주로 엄마의 편이었다. 아빠는
아주 바빴고 말수가 적었다. 주로 혼내는 역할이었고 칭찬에 인색했다. 활기차고 외향적인 엄마를 닮은 오빠와는 대화와 교감이 가능했지만 당신을 너무 닮은 나와는 조금 힘들었다. 주말도 없이 일하느라 얼굴 볼 새가 없는 아빠가 낯설었다. 엄마와 다툼이 있을 때면 둘 중 언성이 더 큰 아빠가 무서웠다. 속상함을 표현할 줄 몰라 나쁜 말로 혼을 내는 아빠가 미웠다. 아빠만 알고 있는 그때의 이야기들을 공부가 하기 싫어지면 하나 둘 들려주었다. 처음으로 둘만의 비밀들이 생겨났다. 역시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다.
종일 함께 공부도 하고 저녁도 먹고 선물로 잔뜩 들어온 호두를 까먹고 아빠의 굳어가는 몸을 마사지하고 집에 갈 때가 되면 아빠에게 숙제를 냈다. 거실에 걸린 달력에 꽃을 하나 그려 넣고 “지나다니면서 오른손 검지로 꽃을 한 번씩 눌러줘” 와 노트에 ‘가나다라마바사..’를 적어 놓고 똑같이 3번씩 쓰기 같은 숙제였다. 어느 날은 이중모음을 또 어느 날은 단모음을 적어놓고 갔다. 내가 숙제를 내고 있으면 슬쩍 물러 앉아 모르는 척하고는 다음 주에 가면 삐뚤삐뚤한 글씨로 ‘가나다라마바사..’를 적어놓았다. 숙제를 내고 시계를 보며 이제 진짜 가야겠다고 일어나면 아빠는 천천히 따라 일어나 현관까지 마중을 나왔다.
“ 조심히 가고 또 와, 자주 와. ”
하고 아빠가 어렵사리 말하면 나도 어렵사리 아빠를 짧게 품에 담았다가 멀어지며 다음 주에 또 보자고 손을 흔들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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