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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 Mar 03. 2023

노예의 삶에 익숙해진 듯한 나

벨기에에 도착한 지 어언 2주가 흘렀다.

아침에 일어나 신랑이 출근하는 것을 지켜봐 주고 나면, 오전 8시부터 나만의 시간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고, 유치원에 다니고, 학교에 다니고, 회사에 다니고,

누군가 남이 정해 준 스케줄에 맞춰서 살아왔던 것이 꽤나 익숙해져 있었다.

이런 걸 경제 관련 책들에서는 현대판 노예의 삶이라고 하는 걸 많이 접했는데, 나는 정말 현대판 노예의 표본이 아닐까 싶다.


나는 갑자기 주어진 이 자유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불안해했다.

해리포터 영화의 ‘도비는 자유예요!’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지은이는 자유예요!’

하지만 난 내게 주어진 자유가 불안했다. 그래도 노력해보려 했다. 이제 1주일이 지났을 뿐이라고, 10일이 지났을 뿐이라고…

그렇게 난 조금씩 자유의 삶인지, 나태한 삶인지, 알 수 없는 자유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 조금씩 박차를 가하는 느낌이 든다.


며칠 동안 심심하다면서 고국의 땅에 있는 친구들에게 카톡만 하곤 했는데, 이번 3월부터는 임시 숙소 로비 층에 있는 헬스장이라도 나가야겠다 싶었다.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워낙 운동과는 멀어졌던 나의 몸은 고작 15분을 뛰었는데 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정말 짧은 시간이지만, 땀 한 바가지 쏟아내고 나니 뿌듯한 이 기분! 무언가 해낸 것만 같은 작은 성취감이 생겼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친구의 지인에게 연락을 걸어 점심 약속을 잡았다.


약속이 있던 어제. 난 아침부터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생각에 얼마나 생동감이 넘쳤는지 모르겠다.

신랑과 함께 집을 보러 다니고, 차를 보러 다니고, 신랑의 회사 분들을 만나는 일들 역시 어떠한 이벤트와 약속이었지만, 내가 잡은 약속이 내게 주는 의미는 나 역시 신랑의 부속품이 아닌 ‘나’라는 주체성이 느껴질 정도의 느낌이랄까?

기분 좋게 준비를 하고, 시내로 나갔다. 작년에 여행 왔던 숙소 근처였다.


점심식사는 박물관 안에 있는 우리나라로 치면 점심 뷔페 식 메뉴를 먹었다. 점심 뷔페 메뉴 26.5유로. 한화 약 33000원.

비싼 가격이라 꾸역꾸역 먹었지만, 정말 타의적 다이어트가 가능한 유럽식 식사였다. 하지만 먹다 보니 한 접시를 거의 다 먹었다. 평소 같으면 몇 숟갈 먹고 내려놓았겠지만, 이 역시 좋았다.

한국에선 생각지 못할 친구의 지인을 둘이 갑작스럽게 만나 점심을 먹는다?라는 뜬금없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제안한 점심 약속을 받아 준 이 친구는 너무나도 나이스하고 글로벌하고 배우고 싶은 것이 많은 공통점이 있는 사람이었다. 맘에 들었다.

내게 첫 주체적인 약속의 대상자가 되어준 그녀는 그녀의 일터에 가서 한국어 책도 빌릴 수 있는 공간을 소개해 주었고, 따뜻한 차 한잔도 내주었다.

타지에서 이런 친절을 받게 될 때는 더 큰 감동이 오는 것 같다. 나는 따뜻하고 즐거운 주체적인 자유의 시간을 맘껏 누렸다.


불과 3시간의 외출이었지만, 난 나에게 주어진 자유의 시간을 얼마나 알차게 보낼 것인지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나에게 펼쳐질 3년간의 시간이 기대된다. 나는 무엇을 하며 이 시간의 퍼즐을 알차게 맞춰 나가게 될까?

오늘은 또다시 집을 보러 나간다. 전혀 가보지 않은 동네를 탐험하며 그곳에서 느낄 예상치 못할 순간들이 기대된다. 조금씩 긍정의 힘이 솟아오른다.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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