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by YUN

글을 쓰기 적절한 때란 있지 않지만 어울리는 때가 있다면 아마 여행을 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오랜 친구와는 뭘 해도 즐겁고 가보지 않은 도시를 누리며 맛있는 걸 먹는 것만큼 신나는 일도 없다.

나를 어른스럽게도, 유치한 아이로도 만들어 주는 친구. 그 애의 존재에 다시 한번 안심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동시에 내가 모르는 곳의 사람들과 처음 발을 디뎌본 공간은 자꾸만 지쳐 꺼져가는 의지를 일으켜 세워줬다. 많은 곳으로 떠나기 위해선 다시 오늘에 머무르고 버텨야 한다는 역설과 함께.



한 책방에 갔다.

한쪽 구석에 이름 없는 책들이 놓여 있었다.

이름이 없는 것이 이상하리 만큼 매력적이었다.

다 읽고 나선 꼭 이름을 붙여 줘야지.


눈에 띈 한 권의 책을 덥석 집어 들었다.

저는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될 줄 알았던 마음들을, 솔직하게 꺼내놓은 이야기예요. 잘 모르겠는 채로 버텨온 하루들이 사실은 꽤 용감했다는 걸 알려줍니다. 읽고 나면, 서툰 지금의 나도 충분히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 져요.


갈수록 애가 되어 가는 것만 같은 지금, 근사한 어른이 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용감하다는 말이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응석이 늘고 영원한 내 편에게 큰소리를 쳤다. 느닷없는 허세가 늘었다. 무섭지만 무섭지 않다고 말하는 건 아이의 객기인지 어른의 용기인지 잘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늘 하고 있는 짓이었다.


이름 없던 그 책은 예상대로 흔한 에세이였다. 그러나 왠지는 몰라도 기대 이상이었다. 저자의 사회초년생 시절이, 누군가가 나와 같이 고군분투한 일화가 잠시지만 눈시울이 붉어질 만큼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네 잘못이 아니야.’와 같은 평범한 말도 필요한 이에게 닿았을 땐 묵직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기라도 한 듯, ‘에세이는 뻔하고 진부하다’라는 편견과 저항심은 점차 풀어지고 알 수 없는 감정만이 둥둥 떠다녔다.

익숙한 것도 특별해 보이는 여행의 묘미처럼.



숙소에선 친구가 추천해 준 영화를 봤다.

‘마루 밑 아리에티’란 제목으로, 마루 밑에 사는 소인족 사람과 인간의 따듯한 우정을 담은 이야기였다.

심장병을 앓던 인간 남자아이 쇼우는 자신의 손바닥보다도 작은 소인 아리에티를 보며 삶의 의지를 다시 품는다.


1시간 30분이 지루하지 않을 만큼 몰입도는 높았지만 예상보다 허무하리 만큼 영화는 빨리 끝나버렸다.


뭐야, 이게 끝이야?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데?
갑자기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니지!!

새벽 두 시, 졸린 마음을 꾹 참고 영화를 다 봐놓고도

아쉬운 마음에 투정 부리듯 불만을 쏟아냈다. 그렇게 동동대는 내 모습을 본 친구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야 너무 뭐라 하지 마. 재밌었잖아.
뭘 그렇게 꽉꽉 닫힌 결말만 좋아하냐?

난 열린 결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파헤치지 않아야 아름다운 것들도 있는 것이라고,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쓰지 않았던가.

부디 크기도 종족도 다르지만 살고자 하는 그 두 주인공이 각자의 방식으로 잘 살아갔길. 그 선택에 행복해했기를 바랐다.


아마 그럴 것이다. 주인공의 크레딧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것까지 작품의 일부이고 내 생각이 곧 작품의 매듭일 테니. 상상의 공백은 언제나 많은 가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설레는 일임을 조금 알 것도 같다.




책방에서 꾹 눌러 담아 온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래된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꿈이란 꿀 때와 이룰 때, 이뤄갈 때 중
어느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가.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자꾸만 정의하고 싶어지는 것도 병이다. 그래도 굳이 계속 생각했다. 모두 위대한 순간이지만 역시 돌아보았을 때 애틋한 건 그것을 꾸고, 각성하고, 덤비는 그 순간이 아닐까, 하고.


잘은 몰라도 해볼 만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니 세상에 너무 빨리 타협하진 말자.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늦더라도 맘에 드는 어른이 되자.


갈 땐 답답하기만 했던 느긋한 무궁화호가 여전히 제속도를 지키며 달렸다. 덕분에 창가 사이 낯선 풍경을 눈에 담는 여유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꽤 근사한 여행이지 않나 싶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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