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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의 소통법

딸 이야기 2

by 유목민


"이쁘다. 우리도 저기서 사진 찍을까?"

"찍으라는 건지 모르겠네. 불도 꺼져 있잖아."

아차! 솔직히 난 못 봤다. 꽃들이 눈에 더 먼저 들어왔다. 딸의 말을 듣고 보니 네온 글씨 램프가 꺼져 있다. 딸은 시각적으로 예민한 편이다. 어릴 때부터 미술을 워낙 좋아하고, 손재주도 많고, 색 선호도도 확실한 편이라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이번에 상담을 받으면서 마음 점검 심리검사 결과를 보니 다른 점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임상 면접, Rorschachm, SCT, HTP, KFD, JTCI, MMPI -2 등 다양한 심리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치료에 대한 아이의 의지도 확고했고, 무엇보다 상담 선생님과의 라포 형성이 첫날부터 수월했다. 딸이 늘 원했던 상담소의 조건을 잘 갖춘 덕분인 듯했다. 가정이나 카페가 아닌 독립적인 공간으로 주말에는 파티룸으로 쓰인다는 상담소는 깔끔하지만 강약 조절이 잘 되어 요즘 세대의 감성에 잘 맞는 곳이었다. 까다로운 딸 눈에 들었으니 상담뿐 아니라 공간 구성에 대한 감각도 일단 합격점을 받은 것.




B.G.T 검사 시 회상 과제에서 딸은 7개의 도형을 회상해내었고 시각적인 단기 기억능력이 평균 이상으로 나타났다. 대개 3개 정도가 평균이라고 한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기억하는 아이가 오히려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은 보지 못하는 정서적 문제가 발견되었다. '칼라 카드 반응에서 상당히 피상적인 수준에서 지각하는 면이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감정에 동요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적절한 상황 인식이나 판단이 모호해지고 불안정해지는 면이 있음을 시사하며 때로는 부정적 감정에 동요될 때 외부 정서 자극에 과민하게 지각하는 면은 있지만 이러한 감정을 인식하고 처리하는 역량이 유연하게 발동되지 못하는 상태'임을 알려준다.


놀이터 사건이 단적인 예이다. 다음 날 아침 딸을 앉혀놓고 지난밤 내 느낌을 얘기했다. '술은 그렇다 치자 문제는 카페도, 음식점도 아닌 한밤중 놀이터에서, 더구나 모르는 남자들이 득실대는(물론 아는 남자들이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바로 옆에서 어떻게 술을 마실 수 있냐?'라고 물었다. 놀이터에 들어서자마자 큰소리로 떠드는 그들의 불량스러운 언어와 행동들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었다. 그런데 딸은 '자기들뿐 아니라 다른 대학생 언니들도 있었고, 그들이 언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자 얘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결과에서 보여주듯 '감정에 동요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적절한 상황 인식이나 판단이 모호해지고 불안정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담 선생님도 딸의 말이 사실이고, 그 자체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라고 설명해줬다. 그러나 딸 가진 엄마 맘이 그렇듯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딸을 어쩌나 싶어 눈앞이 깜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설명했다.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행동이다. 엄마와 오빠가 그 시간에 가지 않았다면 무서운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한밤중 놀이터는 카페나 음식점과는 다른 매우 위험한 장소'라고... 딸은 다행히 '그 부분은 자기가 잘못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순순히 했다. 너무나 놀라고, 당황한 마음에 딸과 같이 있는 친구에게는 '너도 얼른 집에 가라'는 말을 남기고 딸을 데려오긴 했지만 마음이 많이 쓰였었다. 그날 밤 112에 신고도 했다. 남의 딸이 내 딸로 인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


딸은 전반적으로 자존감이 낮고, 자기 가치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자기 비하와 우울증도 발견됐는데 기분의 오르내림과 이로 인한 부적응적인 행동(중독 등)의 가능성도 모든 검사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현상은 만 3살 이전의 영유아기 시기의 경험도 영향을 줬을 수도 있다고 한다. 3개월 출산휴가가 끝나고 일터에 돌아간 엄마를 대신하여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주머니께서 아이를 돌봐주셨는데, 아주머니의 건강 문제로 1년이 지나고, 다시 친할머니와 고모로 주 양육자가 바뀐 경험이 있다. 돌 무렵까지 시어머니에게 맡겨뒀던 아들과 달리 딸은 잘 때만큼은 데리고 잤기에 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만 3살부터는 직장 어린이집을 데리고 다녔기에 늘 함께 할 수 있다는 친밀감도 컸다. 모유수유도 18개월까지 했고, 중학교 때까지도 엄마 가슴을 만지며 잠을 자는 아이였기에 애착이 많지만 막내라서, 늦둥이라서 그런 것이라 여겼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함께 살면서 돌봐주셨기에 아들에 비하면 돌봄을 많이 받은 아이였다. 덕분에 나는 하고 싶은 공부와 직장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다. 딸이 병들고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온 무지한 엄마의 잘못이 크다. 딸의 무의식 세계에 잠재되어 있던 것들이 친구들과의 손절로 발현된 것이다. 실제로 딸은 문장 완성검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 "내가 가장 우울할 때는 사랑받지 못하고 내 뜻대로 안 될 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버려지는 것"이라는 나로서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어린 시절에 정서적 박탈감과 상실감, 거부당하는 느낌 등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했기에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고, 괜찮은 척하고, 갈등과 대립은 피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라는 진단이 나온 것이다.




딸은 기질적으로 자극 추구, 위험회피, 사회적 민감성이 큰 데 비해 인내력은 바닥이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격에서도 자율성, 연대감, 자기 초월이 매우 낮다. 자율성면에서는 낮은 목적의식과 유능감, 자기 수용에 비해 그나마 중간 정도의 책임감 덕분에 그나마 학교 출석이라도 성실하게 하고 있단다. 연대감은 공평, 관대함, 공감, 타인 수용, 이타성이 높게 나타났다. 이에 비해 자의식이나 우주만물과의 일체감, 합리적 유물론 등 자기 초월 의식은 낮다. 타인의 기준과 시선에 의해 자신을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항목이다. MMPI-A 프로파일에서는 우울감 지수가 83으로 나타나 매우 위험한 상황임을 알려주었다. 약물치료 병행이 요구되는 수치다. 검사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나의 기대와 달리 모든 수치들이 아이의 현재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 아이에게는 바뀌고 싶은 의지가 있다. 다만 바뀔 자신이 없는 것뿐이다. 주변의 관심도 아이에게는 특별한 경험이 되었는데 격주로 가는 학교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의 시간을 즐거워하게 됐다. 동성친구에 대한 기대가 없던 아이였는데 힘들어하는 자신을 말없이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친구들에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자기보다 더 작은 아이들이 자신을 안아주는데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고 말한다. 숫기가 없어 먼저 말을 걸지 않는 딸에게 쉬는 시간이면 다른 아이들이 찾아와 말을 걸어준다고 한다. 자신은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면 된단다. 그렇게 힘든데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고, 기대조차 안 하는 딸에게 서운했다며 싫은 소리는 하는 동네 친구도 있었다. 떠나갔던 친구들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조차 모르고 버림을 받았던 것에 비해 이 친구들은 자신의 잘못을 알려주기도 하고,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먼저 다가와 위로를 건넸다. 학교를 다녀와서, 친구 집에 다녀와서 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아이에게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제 너희는 초등학생도, 중학생도 아니고 2년 뒤면 성인이 될 18살 고등학생이라는 이유 때문일 거야. 그땐 그 아이들도 너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몰랐을 거야. 그러나 이제는 친구의 소중함도 알고, 생각하고, 그걸 말할 수도 있는 나이가 된 거지. 이제 너희들은 아이가 아니니까. 그만큼 성장했으니까..."

"근데 엄마, 참 이상해. 상담을 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자꾸 자기 비밀 이야기를 하나씩 해줘. 담임쌤도 그러더니, 오늘은 친구가 그랬어. 가족들이랑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이는 친구였거든. SNS에 가족들이랑 찍은 사진들을 많이 올리는 친구였는데 사실은 친구 부모님이 친구가 7살 때 이혼을 했대. 그래서 자기도 2년간이나 상담을 받았다더라? 나 깜짝 놀랐잖아. 그 친구한테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정말 생각 못했거든."

"맞아! 우리는 자기만 아픔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누구나 하나쯤은 아픔을 갖고 살기 마련이거든. 다만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이야."

감사하게도 아이는 부족한 엄마에게 숨김없이 말해준다. 지난 1년 못다 한 말들을 다 털어놓을 것처럼 평범한 여느 모녀들처럼 수다를 떤다.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니까 고민이 생기면 언제든 엄마에게 얘기해줘야 해"라고 말했던 그 시절처럼 이제 아이는 진짜 내 친구가 된 것 같다. 아직은 마냥 어리고,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할 때도 많고, 때론 속 터질 때도 있고, 이해 안 될 때도 많지만(물론 아이도 내가 그렇겠지만) 솔직하게 말해주는 아이가 고맙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주변의 반응이다. 아이는 자신의 아픔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아픔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결국 그런 경험들이 아이를 자라게 할 것이다.




내일은 아이와 정신과에 가기로 했다. 아직 정신과에 갈 용기도 없었고, 상담 선생님 말대로 집 근처 가정의학과에 가서 약 처방이나 받을까 했었는데 내 브런치를 구독하는 지인이 오늘 연락을 주셨다. 고민을 말씀드렸더니 마침 잘 아는 곳이 있다며 소개를 해주셨다. 병원을 들렀다 미장원에도 갈 생각이다. 아이는 원격수업이고, 나는 쉬는 날이다. 고마운 이들 덕분에 다시 힘을 내보려 한다. 아이에게도 내일 스케줄을 상의했더니 순순히 그러겠다고 한다. 아직은 아이인지라 '나 약도 먹어야 돼?' 하는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아이라서 한편 다행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이 아이에게 더 큰 자양분이 되어줄 것을 믿는다.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 결국은 함께 하는 사람들과 기대어 버텨내는 것임을 알게 될 테니까. 쉽지 않은 시간들이지만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사람들을 기꺼이 도울 수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가 늘 함께할 거라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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